<Panic Room> 전시회
*전시회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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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작가의 작품은 일상을 관음 하되, 그 지점에서 푼크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 전제에 대해 잠깐 설명해보자면, 우리는 일상을 조우하지만 대면할 수 없다. 일상을 치환하자면 그것은 이내 삶이 되고, 우리는 그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삶은 항상 어딘가 어긋나 있고, 뭉개져있다. 이은정 작가를 비롯한 세 작가의 전시가 ‘Panic Room’이라는 테마를 건 것도 이 때문일 테다. 우리는 그 어그러진 삶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보아야만 하고, 그렇기에 그 지점으로 아주 깊은 송곳을 찔러 넣어야 한다. 즉, 삶의 이면과 조우하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회화적 푼크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을 살펴보자. 어딘가 독해해내기 곤란하고 심지어는 기괴해 보이기도 하는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다. 첫 번째 작품부터 그렇다. 무언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대칭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은 역시 상하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포함된 회화는 기호에 가깝고 우리는 그 기호를 독해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작가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작품을 독해낼 수 없다면, 작가에게 그 독해법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는 이에 ‘일기’라는 명료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래, 이 작품들은 모두 이은정 작가의 삶이다. 그렇기에 독해해낼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이면을 관음 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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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포착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이은정 작가의 회화 속에서 무엇을 얻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소외’다. 우리의 삶은 양상은 어떠한가. 타자의 입장에서 주체의 삶은 늘 소외되어가는 모양새다. 우리의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 있고 뭉개진 삶의 양태는, 소외에서 비롯된다. 시스템에서 소외당하고, 타자에게 소외당하고, 심지어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이것은 필연적 결말이다. 불가침의 영역에 도달한 개인의 삶은 완벽하게 움켜쥘 수 없으며, 우리는 이를 각자의 삶과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푼크툼을 통해 한 개인의 삶에 묻어있는 상흔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상흔은 각자의 삶을 매개하며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은정 작가의 회화 속에서 얻어낼 수 있다. 그래. 이은정 작가의 작품이 이은정 작가가 바라본 자신의 삶의 단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찔러보아 관음 하되, 우리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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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작가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작업 방식을 바꾸었다”라는 말을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집단을 표현해내는 거시적 작업에서 포착된 그 소외. 그 소외 속에서 공허하게 부유하는 개인의 삶을 표현해내고 싶은 욕망은 작가라면 응당 가지게 될 테다. 시스템을 포착하기보단, 그 시스템 속에서 낱낱이 발견되는 개인에게 주목하는 것. 이것은 이은정 작가가 얘기하는 ‘Panic’이며, 그 ‘Panic’은 삶에서 비롯된다. 이은정 작가의 글에서 “한 현상에는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꼭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경우도 없다. 사회는 도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착한 경우의 수를 내놓으며 나쁜 경우의 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구절은, 전술된 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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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서문에서 “우리들은 언제까지 PANIC을 마중하며 반길 수 있을까”는 아마도 “우리들은 언제까지 삶을 마중하며 반길 수 있을까”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며, 삶이란 결국 Panic 상태의 소외를 야기한다는 사유가 가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