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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Dec 26. 2019

어느 작은 전시회 리뷰

<Panic Room> 전시회

*전시회 리뷰 입니다.


이은정 작가의 작품은 일상을 관음 하되, 그 지점에서 푼크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 전제에 대해 잠깐 설명해보자면, 우리는 일상을 조우하지만 대면할 수 없다. 일상을 치환하자면 그것은 이내 삶이 되고, 우리는 그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삶은 항상 어딘가 어긋나 있고, 뭉개져있다. 이은정 작가를 비롯한 세 작가의 전시가 ‘Panic Room’이라는 테마를 건 것도 이 때문일 테다. 우리는 그 어그러진 삶의 단면을 입체적으로 보아야만 하고, 그렇기에 그 지점으로 아주 깊은 송곳을 찔러 넣어야 한다. 즉, 삶의 이면과 조우하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회화적 푼크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을 살펴보자. 어딘가 독해해내기 곤란하고 심지어는 기괴해 보이기도 하는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다. 첫 번째 작품부터 그렇다. 무언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대칭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은 역시 상하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포함된 회화는 기호에 가깝고 우리는 그 기호를 독해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작가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작품을 독해낼 수 없다면, 작가에게 그 독해법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는 이에 ‘일기’라는 명료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래, 이 작품들은 모두 이은정 작가의 삶이다. 그렇기에 독해해낼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이면을 관음 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포착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이은정 작가의 회화 속에서 무엇을 얻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소외’다. 우리의 삶은 양상은 어떠한가. 타자의 입장에서 주체의 삶은 늘 소외되어가는 모양새다. 우리의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 있고 뭉개진 삶의 양태는, 소외에서 비롯된다. 시스템에서 소외당하고, 타자에게 소외당하고, 심지어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이것은 필연적 결말이다. 불가침의 영역에 도달한 개인의 삶은 완벽하게 움켜쥘 수 없으며, 우리는 이를 각자의 삶과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푼크툼을 통해 한 개인의 삶에 묻어있는 상흔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상흔은 각자의 삶을 매개하며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은정 작가의 회화 속에서 얻어낼 수 있다. 그래. 이은정 작가의 작품이 이은정 작가가 바라본 자신의 삶의 단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찔러보아 관음 하되, 우리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은정 작가가 “집단에서 개인으로 작업 방식을 바꾸었다”라는 말을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집단을 표현해내는 거시적 작업에서 포착된 그 소외. 그 소외 속에서 공허하게 부유하는 개인의 삶을 표현해내고 싶은 욕망은 작가라면 응당 가지게 될 테다. 시스템을 포착하기보단, 그 시스템 속에서 낱낱이 발견되는 개인에게 주목하는 것. 이것은 이은정 작가가 얘기하는 ‘Panic’이며, 그 ‘Panic’은 삶에서 비롯된다. 이은정 작가의 글에서 “한 현상에는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꼭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경우도 없다. 사회는 도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착한 경우의 수를 내놓으며 나쁜 경우의 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구절은, 전술된 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시의 서문에서 “우리들은 언제까지 PANIC을 마중하며 반길 수 있을까”는 아마도 “우리들은 언제까지 삶을 마중하며 반길 수 있을까”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며, 삶이란 결국 Panic 상태의 소외를 야기한다는 사유가 가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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