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식 수용 미학
여기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있다. 회화적 엉성함이랄지, 공간적 분리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이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 지점은 분명하다. 대관절, 아름다움美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계승되는 미학의 과제였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질문은 유효했다. 이에 대한 다양한 미학적 해답이 쏟아져 나왔고, 이것만으로도 미학의 역할은 충분했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美이라는 관념, 혹은 감상, 혹은 감정이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이었다. 다시 한번, 위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것은 미술사적 사조로 설명될 때, 신고전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것의 기능 역시 명확했다. 기능을 한쪽으로 미뤄두고라도 이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美이란 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이 그림이 감응시키는 것은 아름다움美이 전부란 말인가? 답은 당연히, 아니다. 1800년대 파리에서는 렌즈 위에 가상의 이미지를 덧씌워 어두운 스크린 위에 투사하는 마술환등쇼, 즉 판타스마고리(Phantasmagorie)가 유행했다. 17세기에 이미 라테르나 마기카(Laterna Magica)라고 불리는 환등기가 내부에 설치된 광원을 통해 이미지를 바깥에 영사시키는 일을 실현시킨 바 있었는데, 이런 기술이 18-19세기에 들어오면서 보다 대중화된 형태로 유행했던 것이다. 당대의 마술환등쇼에서는 단순한 허깨비부터 시작해서 혁명기에 죽은 인물들까지 되살리며 다채로운 쇼를 펼쳐 보였는데, 허구에 매료된 시민들의 모습은 많은 비평가나 철학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저마다 자신이 허위의식이라 생각되는 지점들에 <판타스마고리적>이라는 형용사 표현을 붙이곤 했고 여기엔 발터 벤야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7년에 계획에 착수하여 13년 동안이나 몰두했지만 역사적 격랑 속에서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된 비운의 프로젝트인 『파사쥬 프로젝트』에서 판타스마고리를 언급한 비평가들의 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벤야민이 직접 적은 짤막한 메모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판타스마고리에 지배되는 세계, 바로 그것이,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다.” 여기서 벤야민을 위시로 한 현대 미학의 주안점이 폭로된다. 바로 예술 작품의 정치화. 다시 말해, 한 예술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는지를 폭로하는 것이 현대 미학의 주된 과제로서 설정된 것이다. 플라톤을 시작으로 칸트에 이르는 고대-근대의 미학 과제는 전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맥락에서 독립되어 있었다. 작품 자체가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시공간을 막론했지만, 이 작품을 해석하는, 또는 평가하고 메타적으로 글을 쓰는 미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른바 탈정치화된 미학으로서 오로지 아름다움美에 천착한 것이다. 현대 미학은 더 이상 이러한 물음에만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이제 이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는 예술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기능을 하는지, 또는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 폭로하고 붕괴시키는 혹은 견고하게 하는지에 관심사가 있었다. 벤야민에 따르면, 현대는 전적으로 구텐베르크적 종말을 의미했다. 활자화된 텍스트는 그 위용이 예전 같을 수 없었고, 이는 이미지라는 시각적, 촉각적(심지어는 청각적으로도) 감관으로 작용하는 텍스트로 대체되었다. 여기에 더불어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과 르미에르 형제의 영사기 발명은, 현대를 기술복제시대로서 정의 내리기 충분했다. 즉, 활자화된 단적인 세계에서 이미지화된 복제 세계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바로 판타스마고리적 세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성과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다. 벤야민이 파악하기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본래적 기능은 제의祭儀적 역할이었다. 종교적 숭배를 가능하게 하고 그 숭고성을 고양시키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벤야민적으로 치환해보자면, 곧 권력으로의 봉사를 조종하는 것일 테다. 예술 작품은 종교(권력)의 명시적, 암묵적 의뢰를 통해 그 정당성을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이미지즘적 복제 세계의 도래와 함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시공간이 아닌가? 첫 번째 세계로서의 현대는 작품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데에 일조했다. 즉,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 작품의 ‘아우라의 붕괴’이다. 사진과 영화라는 이미지로 무제한적인 복제가 가능해진 이 시대에, 더 이상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과거 루브르에만 존재하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이제 무한히 존재한다. 온갖 이미지로 대체 가능해진 이 작품은 그 자율적 아우라를 상실한 채, 일회적 존재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두 번째 세계로서의 현대는 물신 숭배가 지배하는 시대로 작동한다. 소비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거세당한 채 상품에 종속되어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 거란 허구적 믿음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품은 과거 종교가 그러하듯, ‘신으로서 존재하는 물신’으로 드러나며, 이것은 첫 번째 세계와 결부되어 있다. 예컨대, 우리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더 이상 열두 시간에 걸친 고된 비행과 기백만원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 단순히 구글링을 통해서 그것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현대란, 예술 작품의 기능이 붕괴되고 그 기능이 상품에 종속되어 욕망으로서 향유할 수 있다는 허상이 팽배한 시대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더 단적으로 말해, 아름다움美이라고 하는 가치가 유의미한 것인가? 이제 예술 작품이 기능할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아름다움美을 제고하기보다, 그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 벤야민 역시 이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따라서 필요한 것은 복제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즉, 엘리트에 의해 기획되는 선전적 도구로서의 예술이 아닌, 기술 향유자에게 제안되는 사회적 계몽이다. 과거 제의의 도구로서 지배 계급의 정당성을 창출하는, 독점적이고 과두적인 권력관계를 확보하는 은밀한 메타포로서 존재하는 예술 작품은 더 이상 그 가치를 상실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붕괴된 앙시앙 레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복제기술로서 그들을 계몽하는 것으로서의 예술 작품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단순히 아름다움美을 고취시키는, 그 이면에서 권력자의 신성함을 부각해 권력을 숭상시키는, 작품으로서 독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순히 칸트가 얘기한 개념적 포착으로서의 예술 작품이라는 이유로 예술계에서 그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전화라는 목표에서 예술 작품의 지위를 잃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계몽적으로, 즉 혁명적이고 전복적 수단으로써 독해해낼 수 있다면,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여전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벤야민의 선언은 유효한 것인가? 유감스럽지만 벤야민의 이러한 미학적 작업은 그 시대를 놓고 볼 때, 철저히 실패했다. 벤야민이 마주한 것은 계몽된 대중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힌 우민들이었다. 물론 벤야민도 이 실패를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선언한 것은, 다름 아닌 좌파적 지식인의 선전이었다. 즉, 브레히트적으로 말하자면 ‘낯설게 보기’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폭로였다. 파시즘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광기를 폭로하는 도구로서 복제 기술을 이용하고, 그 복제 기술의 대상은 전적으로 예술 작품이었다. 다시 말해, 판타스마고리적 작품 복제를 통해 무엇이 허깨비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폭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반복컨대, 벤야민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이란 아름다움美을 고양시키는 단순한 미적 유희로서의 도구가 아니라, 시대적 정치 상황과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선전물로 유효한 것이었다. 즉, “예술에 의해 제공될 수 있는 정신 분산을 단서로 삼는다면, 지각의 새로운 과제의 해결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개개인은 이러한 과제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 따라서 예술 자체가 그 가장 곤란하고 중대한 과제의 해결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예술이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장소에서 일어난다.”라는 벤야민의 표현을 통해, 미약한 인민의 주체적 결단과 계몽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상화를 어떻게 독해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反대중적인 무가치한 예술작품으로, 하나는 親대중적인 선전화 예술작품으로 가능하다. <구성 No.8>을 보자. 우리는 이것을 그 자체로서 독해하는데 실패한다. 애초에 추상적으로 그려진 추상화에서 어떻게 의미나 미美를 포착해내겠는가. 그렇다면 <구성 No.8>은 앞서 말한 두 가지로서 작동한다. 먼저 전자를 얘기하자면, 이것은 일반 대중에게 불가해로 다가와 선전이나 계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오히려 지식인과 기득권의 은밀한 유희로서 작용하여 순수한 미美적 표현이라는 미망을 쫓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벤야민적으로 말했을 때, 혹은 예술의 종말을 얘기했을 때, 허망함에 불과하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겠다. 후자의 시선으로 <구성 No.8>를 바라보면, 이것은 사유와 감각의 고양을 일으킨다. <구성 No.8>를 접한 대중은 이 작품의 의미를 독해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나 작가의 의도가 담긴 텍스트를 찾아볼 테고, 이는 곧 이 작품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장치로서 작동할 수 있게 된다(이것이 작가의 의도에 반하겠지만). 예컨대, 인물의 묘사를 배제하고 단순히 점ㆍ선ㆍ면으로 구성된 작품을 통해 선전 효과를 배척하고자 하겠지만, 도리어 대중의 계몽을 야기한다. 즉, 대중은 이 작품을 접함으로써 사유를 하게 되고, 이는 작품의 콘텍스트, 혹은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화는 현대 예술 작품의 가치를 다 할 수 있게 된다(물론 이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의 추상화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독해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