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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Jul 07. 2020

강석주 철학집 (1)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서양 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명이었다. 도덕, 형이상학, 인식론 등 각 분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영미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사는 단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등장하는 어떠한 일반적인 입장을 형성한다. 국가에 등장하는 다양한 내용들은 현대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주의 깊고 엄밀하게 고찰한 뒤 반박하는 것 또한 현대의 지성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를 접하는 것은 필요하다. 플라톤은 당시의 많은 덕목들을 거부하고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여느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최고의 요소로 평가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상이했다. 또한 행복 역시 상당히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더 생생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비유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동굴의 비유이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평생 동안 동굴 안에 묶여 우리 앞에 놓인 동굴의 벽면만을 볼 수 있다. 죄수들은 오로지 벽면에 맺힌 상만을 볼 수 있다. 상이 비치는, 즉 그림자가 비치는 체계조차 알지 못하며 그림자가 진짜라며 자위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항을 이겨내고 고개를 돌린 죄수들이 불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 실재들이 그림자보다 더 큰 실재성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후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이들은 결국 동굴 안에서 보았던 상들이나 그림자들은 실재성을 모사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진리성의 정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계몽된 견해가 아직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많은 개인들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가에서 나온 케팔로스를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도덕적 삶이란, 진실을 말하거나 자신이 빚진 바를 갚는 단순한 규칙의 문제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심층적이고 깊은 생각을 권한다. 위의 사항들이 항상 옳은지에 대한 반문이었다. 폴레마르코스는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正義)에 대한 더 나은 정의(定義)를 내려달라고 말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어떤 경우든 어떤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 주장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무지한 행동이라 말한다. 행복이란, 악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인습주의, 즉 도덕적 구별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기게스의 반지는 이러한 회의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기게스와 같은 반지를 손에 넣는다면 기게스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까? 도덕 원리들을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존재하는가? 하지만 이 논리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것은 단지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또한 정의 그 자체의 본래적 가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정의는 우리를 부담스럽게 할 뿐이며, 이를 행하는 이유는 더 작은 악을 택하는 것이고 타인이 우리를 해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도덕적 회의는 플라톤에게 정의로운 삶이 정의롭지 못한 삶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논증하게 시킨다. 


우선, 글라우콘은 선을 그 자체로 선한 것, 그 자체로도 선하고 결과 역시 선한 것, 부담스럽고 성가시지만 결과는 선한 것으로 구분한다. 그는 사람들은 대게 세 번째 유형을 정의라고 말한다고 주장한다.(기게스의 반지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므로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는 결국 정의가 도구적인 선의 범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에서 정의 스스로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니는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에 대한 설명을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근저 깊은 곳에 놓여있는 구조로 설명한다. 즉, 도덕성의 기준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닌, 자연적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습주의나 상대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오류를 범한 것이다. 즉, 실재적인 어떠한 것은 좇는 것이다.


동시에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이다. 이상을 좇으며 현실적인 것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이상은 현실적인 것보다 더욱 큰 실재성을 지닌다. 이상은 영원불멸하지만, 현실은 일시적이다. 정의는 영원불멸하지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제도나 관행들은 일시적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이상(=형상)은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이를 통해 불변하는 실재성을 파악한다. 그의 궁극적 주장 중 하나는 선의 형상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바로 그러한 세계의 실재 모두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도덕의 근거로써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는 국가 또는 사회이며,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국가가 대문자로 쓰여진 개인이라고 말한다. 개인과 국가 간의 유사성을 찾고 이를 통해 개인의 본성을 보다 손쉽게 파악하는 것이다. 국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조직화된 노동의 분화를 통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노력이 필요해진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하고, 시민들은 계층이 분화된다. 수호자, 보조자, 생산자 계층으로. 이상적인 국가는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할 수 있게 타고난 재능의 구별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자연적 본성 그 자체가 사회 조직을 성공적으로 구성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국가 내에서 각 계층은 각각 특별한 정신적인 특성이 요구된다. 통치자들과 수호자들은 폭넓은 지성(=지혜)이 요구된다. 이들이 국가 전체의 선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 역시도 선을 바라고 추구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보조자 계층은 정신적ㆍ육체적으로 강건해야한다. 이는 플라톤이 혼이라고 표현한 것을 소유해야 하는데, 충분한 훈련과 교육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용기라는 덕을 발전시켜야 한다. 생산자 계층은 합리적 지성이나 강건함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들의 성향은 욕구에 의해 지배되기에 이를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요구되는 덕이 절제(=인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절제라는 덕은 단순히 생산자 계층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전 계층에게 요구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하여 이성 또한 통제를 받아야하며 목적수행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영혼은 현명한 목적을 향해야 하며 결코 비이성적인 충동을 추구하기 위하여 폭발되어선 안 된다. 그렇기에 절제는 모든 계층에 요구된다. 이 절제는 크게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과 감각적 쾌락을 조절하는 것의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여기서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 역시 포함인데, 이는 자신의 지위나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와 개인 모두 자신을 잘 통제해야 하며 이는 절제의 덕을 드러낼 경우에 실현된다. 각 계층이 절제의 덕을 발현할 경우 모든 시민의 욕구는 매우 잘 충족될 것이며 행복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적 국가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국가는 결국 인간 본성에 기초해 있으며 이를 인정하고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正義)와도 맥을 상통하는데 이는 조화와 균형이다. 자신의 몫을 행하고 이를 잘 행할 때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이고 곧 정의가 된다. 


이런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여러 단계가 요구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이다. 수호자와 보조자 계층에게 교육이 필요한데 대중과 분리되어 계속해서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한다. 여기서 수호자 계층의 젊은 구성원은 가족 중심의 삶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수호자들은 오롯이 전체로서의 국가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다움을 좇을 수 있도록 예술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선을 좇고 악을 배척하기 위해 육체적 훈련 역시 필요하다. 이런 교육 이후 평가로 선정된 수호자들은 지혜를 교육받는데, 그 중심에는 수학이 있다. 일련의 교육이 끝나면 그 수호자들은 철학자가 되어있으며, 철인왕으로서 진정한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교육의 주된 목표는 각각의 계층이 자신들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얼핏 독재국가로 비추어질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플라톤이기에 이는 더욱 설득력이 강해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시민 전체를 위해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청사진을 그린다. 시민들에게는 선을 요구하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와 같은 독재를 막기 위하여 통치자는 부를 축적해서는 안 되고 이성의 빛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목표하는 바는 인간의 영혼과 유사한 것으로 국가를 구성하고 이로부터 개인의 자연적인 특성과 덕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결국 영혼의 정의가 국가의 정의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도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기본적인 통찰 중의 하나는 인간의 인격이 복합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서로 다른 여러 측면 각각 나름대로의 필요와 욕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개인 전체의 불만족을 낳고 전체의 목적의 달성에 실패하게 된다. 또한 기개와 관련된 우리의 의지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이 억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감정 역시 조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사고하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아간다. 이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욕망(감정), 기개(=의지),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비율로 소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각자 걸맞은 계층에 속해야 하고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떤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가? 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지혜의 덕, 기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용기의 덕, 그리고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절제의 덕을 통해 세 부분을 조절해야 한다. 계층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나머지 두 부분의 작용을 지배함을 깨닫고, 각 구성 요소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필요한 바를 충족시키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를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또한 플라톤은 이러한 삶이 행복한 삶임을 넘어 그 자체로 선한 것임을 보였다. 행복하다는 것은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이고, 이는 선을 포함하고 진정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은 정의롭지 못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질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부조화, 불균형하며 병약한 상태로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의로움은 우리가 좇아야하는 것인데,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수호자와 보조자, 생산자가 지닌 지성은 차이를 보인다. 각각이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지성만이 더 실제적이고 도구적이며 전략적이다. 이를 통해서만이 형상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보조자, 생산자 역시 수호자들이 정한 규칙에 따르게 되고, 이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뤄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과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비록 같은 방향을 지향하지만 차이를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주지주의자인 반면, 플라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성보다 현실 욕구에 제한되며 지성마저도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플라톤은 모든 시민들이 감정과 관련된 교육을 받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비자발적이며 무지의 결과라고 얘기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거부한다. 우리는 악을 혐오해야만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에 악을 혐오하고 참된 지식을 사랑하는 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비록 플라톤일지라도, 그에 대한 주장은 완벽하지 않았다. 우선 정의(正義)에 대한 완벽한 정의(定義)를 내리지 않았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완벽히 반박해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정의의 덕을 내비친 사람 역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또한 건강은 한 개인 자신을 위한 가치인 반면 정의의 개념은 주로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는 가치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개념을 엮은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어떠한 행위가 그 자체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이러한 행위가 일반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지적한 후 문제는 우리의 균형과 조화가 깨진 영혼이라는 점을 지적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하고 정의로운 영혼의 소유자는 정의로운 국가에 참여하는 자이다. 이는 곧 영혼에 있어서의 정의를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피하고 행복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특히, 특정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를 일반적으로 내림으로써 개인의 영혼과 국가의 상태에 비추어 이를 이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는 소크라테스식 반박에 부딪히는데, 정의라는 것은 어떠한 본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정의는 어떤 행위 유형들로 정의 될 수 없는데, 플라톤의 논증은 특정 행위들이 정의롭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정의로운 행위의 예들을 제공할 뿐 그것이 왜 정의로움의 예시가 되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은유나 개념의 인식론적인 지위,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요구되는 것에는 많은 비판이 따른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답이 주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플라톤이 흥미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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