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그도 그럴 것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만큼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지만, 차이점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드러나는 차이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을 완강히 거부함과 동시에 개별적인 사물에 구조를 부여하며 이것을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 형상이며 이를 본질의 개념이라 말한다. 플라톤에 비해 감각적ㆍ경험적 지식을 중요시하며 플라톤의 다소 심오한 선의 형상 개념을 바깥으로 끌어낸다. 이런 뚜렷한 차이점으로 위와 같은 과장된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지적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소유한 윤리적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즉, 종래의 윤리적 신념과 자신의 의견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학적으로 옹호하고 명료화하여 체계적인 도덕적 세계를 구축한다. 한 개인이 단순히 종래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부정하고 일부는 유지함으로써 더 나은 체계적인 일련의 신념들로 조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는 플라톤과 같은 개혁주의적인 방식이 아닌, 종래의 신념을 정제하는 방식이기에 이에 대한 지적점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저서이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 주장은 “모든 기술과 탐구, 또한 모든 행위와 결정은 어떤 선을 목표 삼는 것으로 여겨진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중하게 행해진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일반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물리적인, 무생물의 영역조차 나름의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런 목적론적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추구하는 몇몇 목적들 또는 선들은 상위 선이나 목적을 얻기 위해 필요한 도구적인 선이라고 말한다.
도구적 선과는 대조적으로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본래적 목적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추구하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추구하지 않는 어떤 목적, 더 나아가 우리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목적들을 추구하게 되는 그러한 목적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욕구는 공허하고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라는 논증을 제시한다. 이 논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 목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욕구들이 공허하고 허무해질 것이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만약 궁극 목적의 부재로 인해 목적의 무한 소급이 진행된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것을 욕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으며 특정한 욕구의 충족을 목표로 삼는 어떤 행위도 완전히 정당화 되지 못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의 무한 소급은 존재할 수 없기에 궁극 목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물론 이에 대해서도 지적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궁극 목적을 “최상의 선” 또는 “행위를 통해서 추구되는 모든 선들 중 최고의 것”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결국 그 궁극 목적이 최고선이라 말하는 것이다. 최고선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동의하는(최소한 용어상으로)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과 행복을 동일선상에 놓고 과연 행복이 최고선의 기준에 들어맞는지 검토한다. 그 조건들로 다음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로 최고선은 우리 인간이 오직 그것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는 그러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최고선은 무조건적으로 완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최고선이 자기 충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위의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보았다.
물론 최고선을 행복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기독교 입장에선 행복이란 세속적인 가치밖에 지닐 수 없는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신에 의한 구원과 회복을 무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칸트의 경우 행복한 삶이란 의무에 따르는 삶이라 말한다.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런 의무가 부여한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이 최고선이지, 우리가 욕구하는 목적을 따르는 것, 즉 행복은 최고선이 아니라 말한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대로 행복이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정확히 무엇일까? 어떤 이는 행복을 쾌락과 동일시하고 어떤 이는 행복을 명예와 동일시하고 어떤 이는 행복을 부와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전개한다. 자신의 목적론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자연의 개념에 호소하는데, 세계 안의 모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선’이 무엇인지 확인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 따라 우리가 오직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기능을 찾는다면 우리의 ‘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성이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선 인간에게는 능동적인 사고와 추론을 담당하는 이성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욕구와 생존을 포함한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중 욕구가 이성에 따라 이성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즉,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 부분에 속하며 욕구가 이에 명령을 받고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최고선이란 이 두 부분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를 빌어 덕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윤리학에서 도덕적 일반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여러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우선 덕 활동은 일생동안 추구되어야 하며, 행복은 최소한의 외부적 선(용모, 자녀 등)이 요구되어진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성숙한 삶 전체 그리고 죽은 후까지 포함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여러 가지의 덕 이론을 제시한다. 이성적 부분을 잘 다스린다면 사고의 덕(지적인 덕)을 얻을 수 있고, 비이성적인 측면을 이성으로써 잘 다스린다면 본성의 덕(도덕적인 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성의 덕들에 상당 부분 논의한다. 먼저 본성의 덕들은 지적인 덕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욕구나 느낌, 감정과 관련된 이 덕은 이성의 목소리를 따라야만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의 행위의 주된 원인이 이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길, 덕은 일종의 상태라고 한다. 이를 우리는 습성 또는 성향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덕”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덕들이 자연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통해서 얻어지며, 이를 습관화하여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 교육은 도덕적 삶의 절대적인 중심에 놓이게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러한 부분을 함양함으로서 우리가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유명한 중용 이론을 전개하며 자신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는다. 육체의 상태 대부분이 과도함이나 부족함에 의해 파괴되는 본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적절한 분량”, 즉 중용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어떠한 욕구, 감정, 쾌락은 적절한 때, 적절한 대상에 대하여, 적절한 정도에 관련하여 중용에 도달해야 된다. 여기서 중용은 절대적인, 산술적인 중간점이 결코 아니다. 각자에게 놓여진 상대적인 중간점이 바로 중용이다. 또한 중용은 절제에 대한 이론만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그 감정을 폭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천해가며 스스로 쾌락을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덕이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행위가 절제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절제 있는 행위가 고정된 상태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거나 또는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쾌락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중용은 모든 것은 심사숙고하여 행위하는 것이기에, 이로 인해 쾌락을 얻고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행위나 감정에 중용이 있지 않음에 도달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덕은 행위를 결정하는 우리의 본성의 상태이며, 중용을 통해서 구성되며, 우리 각자에 따라서 상대적이며, 이성의 명령을 통해서 정의되며, 지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정의할 때와 같이 이성과 관련해서 정의되는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통해 개개인이 쾌락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본성의 습관화를 통해 올바른 방식이 뿌리내렸을 경우 가능하다. 이는 덕이 있는 사람과 자기를 조절하여 정당한 것을 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근대의 도덕, 즉 “칸트적인 도덕성”과의 차이점이다. 칸트는 자신의 욕구를 물리치고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며, 이는 자율적인 도덕적 행위자로 행위할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옳은 것을 행할지라도 이를 통해 쾌락을 얻으므로 의무에 입각한 행위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어렵게 만들 것이라 말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신념을 최고선에 대한 구성 요소로 반영하며 자신의 행위를 즐기는 사람이 더욱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본성의 덕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행위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고 평가함이 중심에 놓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반자의적으로 만드는 것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강제이다. 행위하는 개인의 인격 외부의 어떤 원인이 작용하는 경우 말이다. 그러나 외부적 영향 하에 행동했지만 자의적으로 행위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외부적 영향이 작용하지만 결론적으로 자신이 그 행위를 결론짓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행위는 복합적이지만 자의적인 행위로 본다. 두 번째로는 무지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행위의 결과를 모르는 경우, 자의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 무지는 상당히 특별해야 한다. 옳고 선한 행위에 대한 무지가 아닌, 행위 전후나 관계나 결과와 관련된 “특별한”무지 말이다. 또한 무지한 채로 한 행위와 무지로부터 한 행위를 구별한다. 그러나 오직 후자의 경우만 반자의적 행위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행위자는 자신의 무지로부터 행위했을 경우, 이에 대한 심각한 후회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오면 그는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영혼을 나눈다. 일반적으로 이성적 영혼의 기능은 지적인 작용이다.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순수한 이론적 추론의 기능이다. 이는 본질적, 불변적 우주의 법칙들을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과학적 부분”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부분들”이다. 이를 실천 이성이라 부른다. 이것의 역할은 영혼이 행복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다. 전자는 진리에 도달하도록 하며 덕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즉, sophia(이론적 지혜)를 드러내게 해줄 것이다. 후자는 행복에 도달하도록 개인의 본성이 잘 작용하도록 도움으로써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phronesis(실천적 지혜)를 드러내게 해줄 것이다. 특히 실천이성은 심사숙고함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며 지성이라는 덕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특정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를 목표로 삼는다. 또한 기술적 지식과 달리 지성은 올바른 행위를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행위란 우리에게 달려있으며 심사숙고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실천 이성에게는 구체적 임무가 존재하는데 우선 비이성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욕망과 느낌, 감정들을 인도하여 특수한 여러 상황들에서 중용에 해당하는 감정이나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사숙고는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복합적 상황을 이해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 이성은 일반적인 규칙에 의존하지 않는데, 규칙 그 자체만으로 어떤 특수한 행위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모든 세부적인 상황을 포괄할 수 없고,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한 “눈”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실천 이성은 수단에 대한 심사숙고를 행하게 한다. 적절한 행위를 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사숙고를 하게 한다. 이를 위해 실천적 삼단논법을 통해 심사숙고를 하게 된다. 이 추론이 옳은 것이 되기 위해선 행위자로 하여금 진정으로 선한 것을 목표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목표로 삼은 선이 직접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면 심사숙고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밟아야 될 간접적인 과정들을 확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실천이성과 심사숙고를 통해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 알아도 실지로 행동으로 실행되지는 않는다. 이는 의지의 나약함 때문이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떤 것을 명확하고 분명히 인식하는 것과 기억해낼지언정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눈다. 어떠한 상황에 놓여 인식이 가려지는 것이다. 의지의 나약함은 후자에서 발현된다고 말한다. 이 의지의 나약함은 우리의 인식을 가려버리고 사실을 무시하도록 만든다. 이는 곧 내 본성상의 결점이 되며 그릇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 이성을 넘어 이론 이성 역시 이론적인 부분의 덕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 이성이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진리를 파악하려는 목적을 지닌다고 보았다. 일련의 명제들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 공리를 통해서 그 진리성이 그대로 정리들에로 옮겨진다. 사물은 이러한 법칙보다 더 특수한 법칙을 지니게 되는데, 자연과학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리들로부터 더 특수한 정리들을 이끌어내는 과학적 인식 능력과 공리들이 자명하게 참이라는 사실을 갖추는 능력을 지니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론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이론적 지식이 오직 사물의 본성에만 관련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만들지 않으며, 단지 사물들의 영구적인 본성을 밝힐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론 이성을 최고로 여기며, 이를 관조하는 삶을 최고의 삶의 형태로 취급한다. 이것은 곧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해주는 무언가를 파악해주는 도구이며 오롯이 인간에게만 담겨있는 이성적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은 수많은 개별적인 실체들로 이루어지는 이들은 공간과 시간상에 존재하는 실재로서 최소한 우리의 사고 작용 또는 추상화의 과정상에서는 두 가지 요소로, 즉 물질적인 기초와 감각적이고 파악 가능한 형상으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다. 실체의 질료는 그 실체를 구성하는 재료에 해당하며 있는 그대로의 질료에 어떤 형상이 부여됨으로써 구체적이고 특수한, 고유한 어떤 실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다. 개별적인 실체와 관련해서, 모든 실체들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무언가가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가정한다. 그 무언가를 제 1 질료라고 부른다. 이 대척점에 있는 것을 순수형상이라고 부른다. 또한 자연을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파악하여 개별적인 실체들 역시 변화하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형상을 잃기도, 얻기도 한다고 말한다. 즉,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바대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처음부터 형상은 잠재되어있으므로 본질적으로 이를 실현시키는 것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 설득력을 뒷받침해준다. 이는 곧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맥킨타이어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한 윤리학에 반대한다. 이것에 의하면 감정들의 목적뿐만 아니라 이성의 본성적 목적에 대한 어떤 가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맥킨타이어는 이에 반대하고 인간의 목적을 보편적인 생물적 무언가가 아닌 사회적 관행들에 기초한 어떠한 특수한 것이라 말한다. 또한 본질이라는 것이 단지 유사한 속성들의 집합이라고 말하며 인간의 본질이라 칭해지는 이성이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유되고 있으며 이런 모호한 유사성으로 인간을 통합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자연적 성질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런 분류 체계가 매우 임의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일 이런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한들, 이것이 왜 인간의 본질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행복의 성취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였을 때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생각되어야 되는지 말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행복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결정하는데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단지 상대적이라는 사실만을 알려줬을 뿐, 독립적인 기준으로서의 개념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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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깊이와 합리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