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석주 Sep 12. 2020

강석주 철학집 (3)

토마스 홉스

홉스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근대 철학적 사고의 창시자이다. 이들 모두 실재의 본질을 확인함에 있어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즉 신앙의 도움을 배척하고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였지만 그 실재의 모습은 판이하였다. 데카르트는 정신/물체의 이원론을 제시하며 두 종류의 실재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실체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실재이다. 이이들은 형이상학적으로 구별되며 함께 결합되어있을 뿐 아니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고 말한다. 특히 정신적 실재는 사고와 감정, 의지의 작용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홉스는 이를 부정하며 일원론적인 유물론을 채택한다. 모든 실재는 오직 물리적일 뿐이며, 사고와 감정 그리고 의지의 작용은 물리적인 운동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을 주고받은 결과라고 말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윤리학의 영역에 기여한 바가 거의 전무하지만 홉스는 오늘 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윤리설을 제시하고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의무들은 인간들이 생존을 유지하고 더욱 나은 삶에 도달하기 위해 맺은 상호 간의 계약으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이성은 우리에게 무제한적 자유를 포기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자유를 양도하는 계약을 맺으라고 충고한다. 이에 우리는 계약을 맺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게 된다. 여기서 도덕성의 근거가 있고, 의무는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만들어낸 구속이라고 말한다. 결국 홉스에게 있어서 도덕성과 의무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말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고독하고, 곤궁하며, 험악하고, 무자비하고, 짧은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과 의무는 우리에게 생존을 허락할 뿐 아니라 더욱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는 더 나은 거래라고 말한다. 도덕성을 인간에게 내재되어있고 인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도덕성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종래 철학자들의 생각과 홉스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의 본성은 도덕성에 전혀 호소하지 않고 파악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따를 경우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상호간의 계약을 맺고 계약을 통해 나온 의무를 따라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종래의 철학자들처럼 덕 그자체가 보상이거나 목적이 아닌, 다만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홉스의 이러한 윤리적 이론이나 정치적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자연 상태의 삶과 국가에서의 삶의 구별이다. 여기서 이 두 상태는 시대적, 역사적 구별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사회 집단의 구성원이 아닌 상황에서 살아가는 모든 상태를 지칭한다. 이 자연 상태는 사고 실험의 결과 인데, 우리가 만약 국가의 구성원이 아님으로 구성원으로서 지켜야하는 도덕성이나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물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이 가능하다고 보는 홉스는 유물론이라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통해서 답을 제시한다. 홉스에게 자연 상태의 삶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국가에서 벗어난 삶은 우리의 타고난 정념들이 충돌하는 무대가 될 터인데, 특히 우리가 욕구하는 것들이 충분치 않으므로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한다. 그리고 이 경쟁은 적대감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둘째로 이러한 경쟁 상태에서 우리는 이웃을 의심하게 되고 불신하게 된다. 불신은 일련의 전략을 내놓는데, 바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폭력과 간계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 폭력은 방어적 전략이 아닌 공격적 전략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쾌락과 힘의 증대를 이끌어내며 권력을 소유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격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모두는 평판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 허영과 명예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본성은 어떠한 공통적 권력의 제어가 없다면 우리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들은 욕망과 정념에 기초하여 행동하지만, 이것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의 기준이 상이해지며 투쟁 상태는 지속된다. 몇 가지 가정을 통해 자신이 제창하는 자연 상태를 정당화한다. 홉스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평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육체와 정신 모두의 측면에서 동등하게 분배되어 있어서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영원히 지배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는 어떠한 공통의 권력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들로 홉스는 자신의 윤리설을 확고히 한다. 


 홉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자연 상태는 벗어나야 하는 상태이다. 다행히 우리는 자연 상태에서도 이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벗어날 방법을 궁리한다. 이성은 우리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일반 원리를 파악하는데 이를 자연법이라 한다. 이것은 매우 타산적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생존과 복지 사이의 인과적인 관계를 반영하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 상태를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있다. 홉스는 이를 권리와 대비시켜 도입한다. 권리는 “무엇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이고, 여기서 자유란, “외부적인 방해가 없음”을 의미한다. 즉, 내가 행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외부적인 방해가 없다면 나는 권리는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홉스는 방해를 법률과 규칙을 비롯한 여러 규제들이라고 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개인의 행위나 능력의 발휘를 제하는 어떤 규제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자연권이라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 자연권은 “각자가 자신의 본성,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원하는 능력을 사용할 자유”이다. 이는 우리의 행위가 생명을 보존하고 연장하는데 필요한 한에서 무제한 자유를 부여한다. 이러한 자연권은 이성이 자연법을 발견하는 순간 사라진다. 즉, 우리의 권리를 구속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연법에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이성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만약 평화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연권을 우선적으로 위치시키며 다시 우리를 방어할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법의 제 1원칙인 평화를 추구한다. 그리고 제 2원칙으로 자연권을 포기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경우에만 성립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평화를 획득하고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자연권을 포기한다. 홉스는 이를 “황금률”이라 알려진 성서의 법칙을 통해 호소한다. 권리의 포기는 단순한 포기와 타인에게의 양도,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내가 원하는 것을 사용하는데 방해하지 않게 되며 권리의 주장 역시 막지 않게 된다. 어찌됐건 홉스는 의무와 정의의 근거를 자연권의 포기에서 찾는다. 권리의 포기나 양도는, 일종의 서약으로써 우리에게 의무로 부과된다. 여기에 도덕성의 근거가 놓여있다. 만일 내가 나의 권리를 포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다시 행사해서는 안 되며, 타인 역시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정의도 자연권의 포기에서 나온다. 자연 상태에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홉스는 여기서 부정의를 일종의 불합리나 모순, 즉 자발적으로 자연권을 포기했지만 이후 이를 재고하는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부정의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위반한 것이다. 또한 제 3원칙으로 규약을 준수하라 말한다. 제 2원칙에서 우리가 규약을 맺는 것, 즉 서약을 맺는 것은 다른 개인들도 그렇게 하는 한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맺어진 규약은 의무를 지게 된다. 홉스는 이성이 이 계약을 준수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가에 대한 답에 긍정적으로 답한다. 이 계약은 자신들의 평화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홉스는 다시 부정의의 추가 조건을 규약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자연법을 깨달으며 인간들은 서로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계약으로 규약이 형성된다. 홉스는 이것들이 반드시 명시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계약은 추측을 통해서도 가능하며 의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 서로 간의 계약에서 권리의 제한도 한계가 있으므로, 계약 역시 제한된 것이라 홉스는 말한다. 우리의 권리 제한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권리는 포기할 수 없다. 홉스는 이런 여러 가지의 규약준수가 충분한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성이 정의로운 행위를 이끌지 못할 수도 있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의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선 우리는 단지 하나의 이성이나 지혜의 힘만으로 생존하기 힘들기에 우리는 동맹을 맺어야 한다. 또한 동맹을 맺는 것은 그 규약을 지킨다고 생각될 때 유용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 우리가 규약을 준수하며 살아간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에만 동맹이 도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설령 우리가 규약을 지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실이 발견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으므로 우리는 규약을 지키고 정의로운 행위를 해야 한다. 이 반박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는 발견되기 쉬우며 규약을 지키지 않으면 동맹의 존폐가 위태로워진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여기서 홉스는 이성적인 행위의 유형은 상호 간의 계약으로 발생한 규약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다시 홉스의 계약을 살펴보면 이것은 의무를 부과한다. 이에 대해 앞에 언급했던 구속력이 등장한다. 이 구속력에 대해 홉스는 낙관적이지 않다. 자연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구속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인간은 간사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졌기에 이마저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홉스는 강제력을 가진 시민사회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규약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권력을 통해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야 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홉스는 열여섯 가지의 자연법을 더 제시하여 규약의 준수를 더욱 정당화한다. 이는 이성이 어떻게 우리의 도덕적 의무들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지 보여준다. 이에 대한 것 중 하나가 보은이다. 호의를 베푼 사람들에게 보답하여 감사를 표시해야 되며 이것이 서로의 이익을 보존한다. 홉스는 도덕이란 생존과 만족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성적인 탐구라 말한다. 이런 생존과 만족을 위해 보은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홉스에게 ‘국가’란 어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가. 규약을 준수하도록 강요하는 권력의 상징체인 국가는,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다. 권력을 한 개인이나 집합체에 양도해야하며 그것이 바로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이 인위적인 인격체를 말미암아 우리는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번영할 수 있다. 여기서 통치자는 폭군이 아니다. 우선 그는 결코 자리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설령 다수의 의해 통치자가 의문을 자아내도 말이다. 또한 통치권을 만들어낸 계약을 위반할 수 없는데, 그는 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민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리고 통치자 역시 의무를 지니게 되는데, 기본적인 의무는 평화와 생존과 만족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통치자는 검열을 통해서라도 평화와 모순된 여론과 언론을 통제해야 한다. 덧붙여 법에 대한 처벌과 보상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전유한 통치자는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무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국가’가 어떤 형태인지 묘사한다.


 또한 홉스는 종종 심리적 이기주의자로 비추어졌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자기 이익에 맞추어 선을 설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고 행위할 때 이는 자발적인 행위인데, 이때 우리의 의지는 항상 자신에게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이러한 생각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홉스의 저서는 이기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주의’라는 단어를 엄밀히 살펴보고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기주의라는 용어에 대하여 최소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정의가 지금까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어떤 개인이 이기주의적으로 행위하게 되는 까닭은 이전에 그가 행했던 어떤 유형의 행위로부터 얻은 이익이나 손실 때문에 항상 자신이 행위하려는 바대로 행위하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기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인과적 이기주의인 것이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욕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선이라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위하기에 이기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선을 욕구한다면 비이기적으로 행위한 것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욕구하는 바가 무엇인가이다. 따라서 이를 내용적 이기주의라 부른다. 또한 홉스를 윤리적 이기주의자라 부르는 자도 존재한다. 과연 홉스는 궁극적 윤리적 목표를 자기 이익이라 생각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구별이 필요하다. 우선 합리적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합리적으로 행해야 할 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자연법 역시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여기서 파생된 도덕 의무 역시 윤리적 이기주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합리적인 이기주의이다. 


 두 이기주의는 상당히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심리적 이기주의는 자신의 선만을 행한다는 강제의 사슬에 묶여있는 듯이 보여 더욱 그러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로 직결되었다. 홉스는 이러한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그에게 인간의 행위 역시 운동이며, 그 운동은 기계론적인 필연성을 지녔다. 우리의 “자발적인”행위를 관념과 욕구로부터 생겨난 운동의 기계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았다. 결국 홉스는 자발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의 개념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즉, 오직 의지로부터 생겨난 행위를 자발적 행위라 정의내리며. 여기서 의지란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친 최후의 욕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심사숙고의 과정은 기계론적일까? 여기서 홉스의 기계론이 자유와 모순을 일으키지 않음을 알아야하는데, 왜냐하면 홉스에게 자유란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은 행위를 하는 것이고, 이는 심사숙고와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홉스의 이론이 상대주의라는 시각도 있다. 홉스는 선과 악, 도덕적 가치를 개인의 욕구와 혐오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없다. 그 사람의 호오(好惡)가 선과 악을 규정한다. 또한 이에 대한 공통 규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공통 규칙이 존재할 수 있다. 통치자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격체이기에 그의 호오가 시민들의 호오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국가에서는 이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국제 관계에서는 자연 상태의 가치 다양성을 다시 한 번 포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어떤 보편적인 도덕적 진리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자연법이 곧 도덕 법칙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이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보편적 진리이며 국가 성립 이전에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규약을 통해 스스로의 행위에 구속을 가하게 되는 점을 강조한다. 의무를 지게 되는 이 행위는 신념이나 욕구, 실정법과는 무관한 도덕적 강제가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홉스의 이 이론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에 봉착한다. 우선, 자연 상태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와 관련된다. 과연 이성적 존재들이 동일한 전략으로 자신들이 비참한 자연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을 예측하지 못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있다면, 그들은 공격적인 전략을 세우지 않을 것이고 이는 전혀 다른 자연 상태를 이끌어 내 국가의 필연성을 파괴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홉스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실지로 계약을 통하여 그렇게 넘어오게 되었다는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는 암시적인 계약을 인지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어떤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계약을 위반했다고 외칠 수 있을까? 또한 통치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의무가 이전에 다른 사람들과 맺은, 자연권을 포기하기로 한 약속의 결과라면 이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계약은 상당히 암시적이고 가언적으로 보인다. 내가 약속한 바를 행하는 것이 나의 의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약속했는지 인지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 이런 일련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사상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도덕성에 대해 상당히 참신한 해석의 화살을 던졌다는 데에 의의가 있음은 틀림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석주 철학집(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