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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Jul 22. 2021

영화는 어떤 진리를 드러내는가

알랭 레네와 <멀홀랜드 드라이브> 비교

1. 예술의 역할에 대하여


사적史的으로 볼 때, 우리가 미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750년 이후 다.1) 그전까지 ‘미美’는 단순한 감각의 문제이거나, 선善에 종속된 것에 불과했다.2) 이를 바꾸 어 말하자면, 그전까지 아름다움의 사태나 개념이 정확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로소 미학이 태동하고, 칸트의 유명한 3대 비판서 중 하나인 『판단력비판』이 저술되면서 우 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제대로 된 학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우리가 아름다 움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다는 얘기일 테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 아름다움 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감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주체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을 넘어서, 형식 에서 비롯된 객체의 구성을 넘어서,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를 해명하는 것은 대단히 지난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글에서 그것을    생각은 없다(물론 ‘하는 것도 맞다). 대신 이런 질문을 던지며 경로를 우회해볼까  . 우리는 언제 예술을 찾는가,  우리에게 있어 예술은 어떤 역할을 가지고 다가오는가.  렇게 되면 조금 명확해지는 지점들이 생긴다. 다양한 의견들 -예컨대 미적 쾌락이나 정치적 프로파간다, 사상적 천착을 매체의 형식에 빗대는 -  범람할  있겠지만,  모든 것은 하나로 수렴한다. 바로 철학과 다른(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방식의 진리 탐구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엄밀한 고찰에서 비롯된 논리적 분석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면, 예술은 통찰과  관을 통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진리를 탐구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이 절묘 하게 진리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예술의 역할론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해답이 된다. 그래, 예술은 세계 혹은 삶에 대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어 우리에게 그것을 은밀하게 건넨다.

1)  부분에 이견이 있을  있을  같다. 바움가르텐이 ‘미학 효시로서 감성학(aesthetica) 처음 얘기한 것은 1735 『시에 관한  가지 철학적 성찰』이다. 하지만 학學으로서 정립된 것은 1750 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미학』에서부터다.  글에서는 『미학』을 미학의 효시로서 파악한다.
2) 어떤 대상 혹은 사태가 하나의 철학(혹은 학學)으로서 설명되려면  가지 조건  최소 하나 조건 이상을 성립하고 있어야 한다. 우선, 지칭과 개념이 대응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시되는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하나는, 발생론적 논리가 존재해야 한다. ,  대상 혹은 사태가 어떤 방식으로  생했는지 설명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으로서의 미美는 1750 이전까지 이러한 지위를 획득하  못했다. 경험론의 전통이나 합리론의 전통으로  , 이는 단순히 설명 불가능( 정확히는 설명 필요성의 상실)이거나 다른 것의 종속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움가르텐이 감성학(aesthetica) 존립  주창하며 미학읕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독립시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글의 취지와 맞지 않기에 생략한다.


2. 알랭 레네가 포착한 진리


주지하다시피, 레네가 천착한 주제는 ‘기억이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을 어떻게 다뤄  하는지 보여주는데, 초기작인 <밤과 안개> <히로시마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예술적 고난을 마주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역사적 사건의 재현 대한 문제다. 요컨대 과거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직접적으로(심지어 우회적으로) 다룰 때에는 다른 이야 기에 비해 굉장한 윤리적 근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그것에 전해지는 중력은 다른 이야기  비해 제곱 이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창작자는  가지 종국에 다다르게 되는 , 하나는 실패하거나 하나는 단순 아카이빙으로서  과거를 기록하는데 그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을 ‘예술화하는 것은 언제나 난처하다.

하지만 알랭 레네는 이것을 정면 돌파한다. <밤과 안개>에서는 홀로코스트를,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는 히로시마와 느베르라는 두 도시를 병존시킴으로써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극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예술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면 레네는 과거의 사 건을 가져와 당사자를 조망함으로써 세계를 꾸려나간다. 다만 절대로 두 가지 지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데, 하나가 영화의 스펙터클과 또 하나는 윤리성이다. 이것에 실패한 영화의 대부 분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사건의 순간을 스펙터클화 하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는 오감의 예술이고 심지어 운동하는 이미지로서 우리의 감관을 다른 예술에 비해 훨씬 자극한 다. 이 말은 곧 언제든 사건을 하나의 유흥으로 소비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네 는 이 포인트를 끊임없이 인지한다. 그 전략으로서 인물과의 거리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카메 라는 결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레네는 단순히 여기에 머물지 않고 두 번째 지점 역시 인 지한다. 그렇기에 보여줄 수 없는 과거의 이미지, 혹은 소환되어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철저 하게 파악하여 영화에 투영한다.

정리하자면, 레네에게 있어 진리란 과거의 비극을, 더 나아가 세계에 남겨진 상흔을 어떻게 현재화 시키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기억은 중요함과 동시에 유일한 매개가 되고 이를 통해 그 공동 기억을 가진 인간과 그 속에서 개별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는 위로 받고 각성한다.3)


3) 그것은 마치 벤야민의 시간 사유 체계를 영화화 시킨 것과 동일한데, 벤야민에게 있어 시간은 선형적 이고 단선적인, 그러니까 크로노스적인 시간관이 아니라 모종의 원형圓形을 띠고 있는 순환적이고  시적인 카이로스적인 시간관이다. 이러한 시간관으로 말미암아 벤야민의 문제의식인 동시에 레네에게 중요한 문제는 하나의 ‘해방이다. 여기서 해방이란, 과거에서부터 축적되는 역사의 중단을 선언하고 현재에 있어서 억압받고 상처받은 개인의 ‘기억 정지시키는 것과 동의어다.

 

3. 데이빗 린치가 포착한 진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앞선 문제에 대해 강력히 동의하기보다 은유와 환유를 뒤섞어 욕망 의 도식을 보여준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의 이론 체계를 하나의 영화로 만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가장 큰 특징은 종잡을 수 없는 서사다. 다만 <메멘토> 같이 플롯의 배치를 비틀어서 어지러움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롯 자체를 비 틀어서 이를 파편화 시키는데 이른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는 가장 큰 표피적 요인은 바로 꿈 이라는 설정 때문이다. 몽상과 비몽상, 즉 이 두 상태가 서로 대립하며 하나의 큰 서사를 구 축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구조적 환상성은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구조를 짜놓 고 데이빗 린치는 자신의 진리를 영화에 투영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 영화는 굉장히 프로이트적이며 나아가 라캉적이다. 그 말을 바꾸어 얘기하자면, 이 영화 의 훌륭한 해석 방법 중 하나가 그 이론 도식에 영화의 틀을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현대에 굉장히 터부시되는 것 중 하나는, ‘욕망’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플라톤적인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오는 것인지, 현 시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욕망에 충실할 수 없다. 오히려 욕망 은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며, 더욱 과격하게는 ‘거세’되어야 하는 악한 잠재태다. 이렇듯 욕망 의 부정적인 진단은 옳은 것일까. 도리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굳이 들뢰즈 를 끌고 오지 않아도, 현재 가장 강력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근본 원리 가 ‘욕망’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욕망을 제어하기보다 무엇이 진짜 나의 욕망인지 알 고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현 시점에서 옳지 않을까. 만약 <멀홀랜드 드라 이브>가 단순히 전통 정신분석을 따르고 있다면 욕망의 부정성을 변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 울 수 없다. 요컨대 욕망의 문제는 무의식의 해명과 연관되어 있으며, 프로이트는 이러한 해명을 오이디푸스의 과정 속에서 행한다. 우리의 근원적 욕망대상은 어머니이며, 이 최초의 욕 망 대상은 금지될 수밖에 없으므로 억압되고, 그 억압은 다른 대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치 지만, 결국에는 충족될 수 없는 결여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욕망 개념은 억압과 결여를 통 해 정의된다. 그렇기에 전통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정확히는 욕망의 생성 자체)은 부정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결국 데이빗 린처가 현대의 욕망, 더욱이 자본주의에서 욕망이 발현되는 과정 일반 의 가치를 뒤집어 생각한다는 것(진리라 믿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이 영화가 현실의 복무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데이빗 린처 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알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 의견 이 정당화 되려면 선제적으로 두 가지의 얘기가 필요할 텐데, 하나는 데이빗 린처의 상황과 또 하나는 68혁명이다. 먼저 데이빗 린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는 ‘할리우드’ 소속이 다. 그 말은 즉슨, 자본주의의 중심지에 중심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쏟아진 찬사 중 하나가 할리우드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레베카 델 리오가 노래하는 씬은 이를 정확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에서 데이빗 린처가 지적하는 부분은 비판에 그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데이빗 린처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암적癌的인 부분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를 전복시키려는 의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한 세 번째 군상에 해당된다.4) 정리하자면, 그는 할리우드의 복무인임과 동시에 그를 조소할 뿐 그에 그치는 냉소적 인간에 해당될 뿐이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호명되는 것은 자연스레 68혁명이다. 펠릭스 가타리가 68혁명에 대해 “일상적 삶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권력과 그로 인해 차단되고 억압된 욕망, 그런 억압을 당연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으로 확장”5)라고 분석한 것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68혁명은 자본주의를 기저 이데올로기로 삼은 서 구 문화권에게 주체의 혁명을 요구했다. 68 혁명은 말하자면, 대중의 욕망을 억압하던 집단인 노동자 운동을 주도하는 집단이나 대학 당국에 대한 폭발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해왔던 자신에 대한 폭발이었다. 전자가 현실에 대한 공산당의 무분별함이 나 무력함과 연결된다면, 후자는 욕망의 조절과 통제에 암묵적으로 기여한 –욕망의 부정성을 바탕으로 한- 정신분석학의 반혁명성과 연결된다. 즉,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가지고 있는 전 통 정신분석학적 도식은 도리어 현실에 대한 복무를 제창한 것과 동의어라는 말이다. 데이빗 린치에게 진리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현실은 비판 반경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도리어 그곳에서 냉소적 복무를 함으로써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 68-69. 「만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환영이 지식 속에 있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에 머문다면 분명 오늘날의 사회  포스트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일 것이다.  냉소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 이데올로기적 진실을 믿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명제들을 진지하게  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사물들의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 수준에 있다. 그리고  수준에서라면 우리는 물론 포스트이데올로기적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냉소적인 거리 두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 버리는 여러 방식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리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5) 이진경, 『노마디즘1』(휴머니스트, 2002),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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