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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Apr 01. 2022

우리는 좁은 문을 향해 달리잖아요

오늘도 세상을 살아내는 당신께

E. 이렇게 직접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대학 전공 수업 때 종종 마주했지만 학교에서 긴 긴 이야기를 나눠본 일이 없지요. 우리는. 전 선배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래서 선배를 피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당차게 말하는 선배가 너무 멋져서 저와는 어울리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이 생각이 말 몇 마디에 탄로 날까 두려워서 선배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요. 저렇게 멋진 사람은 걱정이 없겠다는 착각을 멋대로 하고는 걱정이 많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집에 돌아온 일도 여러 번입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와 같은 수업을 듣고 울면서 집에 간 일도 있다니까요.


선배한테 가진 감정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게 열등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단순히 열등감이라기보다 존경심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선배와 저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감정이 무엇이었든 스스로를 깎아먹는 못난 감정이었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그래서일까요. 병원에서 우연히 선배를 마주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들었습니다. 놀라움과 미안함, 걱정, 무너짐, 원망…….


강철로만 보았던 선배도 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선배는 걱정도 없을 거라 멋대로 판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걸까 하는 걱정과,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생각에 기인한 마음의 무너짐, 세상에 대한 원망. 뭐 그런 감정들이 물밀 듯 밀려왔던 것 같아요. 눈을 마주친 찰나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제게 먼저 반갑게 말을 걸어준 선배. 선배가 건넨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인사치레인 줄만 알았어요. 저는 그런 인사치레를 자주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당장 연락처를 물어보고 식사 약속을 잡는 선배를 보며 또 한번 제 속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선배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어요. 수업 때 보았던 냉철한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말도 안 되는 콧노래를 부르는 선배의 모습에 참 많이 웃었습니다. 후식으로 달달한 와플을 먹으며 동네를 산책하던 그 밤이 제게는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 중 하나예요. 그런 소소한 행복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엔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문이 좁은 꿈을 향해 달리는 우리에게 세상은 이제 그만 타협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그놈의 나이가 뭔지, 그놈의 돈이 뭔지, 그놈의 지위가 뭔지. 경제적 압박은 심적 압박이 되고, 심적 압박은 신체적 압박이 되는 쳇바퀴를 구르며 미운 마음을 갖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종종 선배가 SNS 비공개 계정에 올리는 글을 보며 많은 공감과 슬픔이 들었습니다. 더러운 세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아내는 것마저 우리의 몫이자, 삶의 값이겠지요.


맹신하지 말자 하면서도 MBTI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선배와 저의 MBTI가 같다는 점은 참 흥미로웠어요. 반갑기도 했고요. 제 주위엔 저와 같이 ENTJ라는 MBTI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데 마침 선배와 MBTI가 같다니요! 선배처럼 멋진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배의 멋진 모습 뒤에 얼마나 많은 부담과 노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ENTJ들이 완벽주의 성향이 짙다고 하잖아요. 저는 완벽주의 성향은 짙은데 늘 뭔가 부족한 편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답니다. 선배도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어요.


E. 여전히 당신은 제게 멋진 사람이에요. 사람과 세상에 열정을 가지고, 꿈을 위해 달리는 사람이죠. 냉철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녀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늘 제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선배를 볼 때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해요. 선배가 꼭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제게 선배가 참 고맙고 좋은 사람이라, 또 닮은 점이 있는 사람이라 더 그런가 봐요. E. 저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라면서도 지금의 슬픔과 분노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훗날 우리와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을 위해 목소리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소망해서요. 또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사람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상처받는 젊은 나날. 그 일부를 선배처럼 좋은 사람과 공유하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가끔씩 오래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요. 서로를 응원하면서요. 오늘도 선배에게 행복한 시간의 조각이 생기길 바라며 편지를 마칩니다.


당신을 응원하는 ENTJ 후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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