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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웅 Sep 20. 2020

소설가란 무엇인가?

소설가 : 써야 하는 이야기를 쓰고 마는 사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 Lewis-

텍스트를 만들고 편집하는 일을 동경한다.
텍스트는 한계가 없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옮기는 곳에 머물고 있다.
텍스트를 언젠가 꼭 쓰기 위해.

지금은 이런저런 칼럼을 쓰며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야만 하는 소설을 쓰는 일은 나에게 언제나 두렵고 신성한 영역이었다. 깨끗한 물에 샤워하고 조용한 명상으로 머리를 맑게 한 후 야무진 각오를 다져야만 간신히 글쓰기를 고민이라도 해볼 수 있다.

“제가 어릴 땐 소설가가 되겠다는 말은 헤밍웨이가 되겠다는 말과 같아서, 굉장한 허세로 들릴 수 있었죠. 그만큼 신성한 일이었어요.” <잡스-소설가, 마르크 레비>

막상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난 후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쓰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주변부로의 도피다. 당장이라도 쓰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을 먹지만 실제 쓰지는 않고 쓰는 것에 대한 준비를 차근차근하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배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타격감이 좋은 기계식 키보드를 인터넷에서 찾아 보는 등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준비하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가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명절의 존재 의미에 뼈를 때린 것처럼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섣부른 정의를 때린 것처럼 마지막으로 나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이 작업을 결국 해야만 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싶었다. 소설가란 무엇인가?

그런데 마침 매거진 B에서 나온  <잡스 - 소설가 : 써야 하는 이야기를 쓰고 마는 사람>​ 는 나를 대신해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대신 질문해주었다. 그래서 소설가란 무엇입니까?


<소설가의 탄생>
담배를 꼬나물고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 같은 조지오웰
샷잔에 넘실거리는 위스키를 단번에 마시며 원고지를 뚫어져라 보는 헤밍웨이
익숙한 책상에서 낯선 노래를 들으며 앞으로 쓸 소설의 주인공 “시인 백석”을 떠올리는 김연수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창작의 고통에 휩싸여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사뭇 안쓰럽다.
하지만 그들은 마침내 글쓰기의 신의 가호라도 받은 듯 순간순간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고 만다.
이들의 시작은 경찰이었고 기자였고 번역가였지만 결국 걸출한 소설들을 발표하며 우리에게 소설가로 남았다.



소설가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미술, 음악, 무용과 같은 예술에는 일찍이 조기교육을 받은 영재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가르침을 받아 일정한 삶의 반열에 오르는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처럼 예술의 특정 카테고리들은 높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경제 자본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고급문화 자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나 칼럼니스트를 위한 조기 교육은 들어본 적이 없다. 글쓰기의 신동이라는 칭호도 낯설기만 하다. 많은 예술가가 이른 나이에 교육을 받으며 양성되는 반면에 대부분의 소설가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밥벌이로서의 직업 전선에 먼저 뛰어든다. 소설을 쓰는데 필요한 자본은 오직 작가의 시간과 집필 의지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열려있기 때문에 특정 자본 계층을 대표하는 것으로 경제 자본을 취하기 어렵다.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영화나 미디어는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을 더 신경 써야 한다. 소설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소설을 대중에게 전달해야 하므로 대중과 감각적으로 소통하기가 쉽지 않지만,  자신이 꼭 전하고 싶은 것을 지켜내며 독자에게 말을 걸 수 있다. 결국 계급과 자본으로서의 수단을 넘어 기어코 써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이 소설가에 도전하게 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커서 작가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는 그 생각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게 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조만간 차분히 앉아 책 쓰는 일을 해야 하리란 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중학생 때 아버지에게 소설가가 꿈이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니 글을 쓰고 싶거든 직업을 구한 다음에 쓰라고 하더군요. <잡스-소설가, 정지돈>


등단

보통 소설가는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간하며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소설가는 등단이라는 특이한 절차를 거친다. 등단은 각종 문학상과 그 문학상을 운영하고 심사하는 기존 문단에서 명망이 있는 문인들에게 선택받는 형식이다. 등단은 일종의 자격증 역할을 하는데 등단이라는 상징 자본을 얻어야  자칭 소설가에서 타칭 소설가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출판사로부터 정식 출간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잡스-소설가>에 나오는 국내 작가들 또한 모두 등단한 인기 작가들이다. 등단이라는 절차는 오랫동안 실력 있는 문인을 발굴하는 데 큰 역할을 해오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가능성보다 기존 문인을 쫒은 보수적인 문학만 발굴하여 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온라인에서 누구나 손쉽게 개인의 글을 발행할 수 있다. 많은 개인들이 브런치를 포함한 다양한 글쓰기 플랫폼을 통해 데뷔하고 수만 명의 팬덤을 가진 웹소설 작가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문단의 인정이 아닌 대중의 팬덤을 통해 작가로서 인정받고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과거에는 등단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였고 그 등단을 위한 문법도 한정적이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채널에서 새로운 등단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다. 소설가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등단만을 목표로 하는 것 보다 자신의 글이 어디에 속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지를 염두하고 스스로 포지션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창작자라면 자신의 포지션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 ‘이 분야를 지금까지 없던 경지로 끌어올리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형식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가겠다’ 마음먹을 수도 있어요. 꼭 출판이 아니어도 괜찮은 표현력을 갖고 있다면 웹이나 영상 쪽으로 가보아도 좋은 거죠. 주변 작가들을 보면 유사한 경우가 많거든요. 소설가이면서 웹툰 스토리나 게임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대본, 영화·드라마·연극 대본을 쓰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잡스-소설가, 정세랑>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처음부터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소설가들의 전직은 무엇이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바 사장님이었다. 조지 오웰은 식민지의 경찰이었고 마르크 레비는 건축가였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책에 소개되는 아홉 명의 작가 중 여섯 명은 글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자(장강명), 편집자(정세랑), 번역가(김연수) 등 이들은 글 주변을 조심스럽게 맴돌며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준비한 것이다.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은 결국 멀리 가지 않고 텍스트의 주변부에 머무른 것이다.

소설가들은 언제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일까?
내가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쓴 글에 대한 타인의 작은 인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단한 영광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오면서 겪은 몇 번의 인정 덕분에 이후로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덜 수 있었다. 이처럼 작가들의 삶 속에는 그들이 소설가가 되는데 용기를 주는 작은 인정들이 존재한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쓴 요나스 요나손은 자신의 글에 대한 칭찬 한마디가 그를 소설가의 길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스티븐 킹은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곳에 투고하였지만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연락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담당자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스티븐 킹은 포기하지 않고 글쓰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기억하나요?”
   
 “물론이죠. 고등학교 스웨덴어 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후 저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나스, 너는 글쓰기에 소질이 있으니 작가나 기자가 되는 게 어떻겠니?” 당시 제가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요. 살면서 무언가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기억하나요?” <잡스-소설가, 요나스 요나손>

희망적인 메모를 처음 보내준 사람은 당시 《팬터지와 과학 소설F&SF》의 편집자였던 앨지스 버드리스였는데, 그는 내가 쓴 〈호랑이의 밤〉이라는 소설을 읽고 이렇게 적어주었다.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 잡지엔 안 맞지만 훌륭해요. 당신에겐 재능이 있군요. 다시 투고해주십시오.’ 만년필로 휘갈겨써서 여기저기 큼직한 얼룩이 남아 있던 이 짤막한 네 문장은 내 열여섯 살의 우울한 겨울을 환히 밝혀주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저>


한 줌의 인정만으로는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의 재능이 곧 자신의 삶을 연장하고 경제적인 상황을 조금이라도 반전시킬 수 있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연금처럼 꾸준히 팔리는 글을 쓰던지  마르크 레비처럼 한 권의 베스트셀러로 경제적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다. 그는 건축가였고 사업가이며 한 아이의 아빠다. 그는 양육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데 일정한 수입이 필요했는데 단순히 책을 몇 권 써서 출판하는 것으로는 전업 작가를 마음먹기 어려웠다.

(종이책 기준 작가의 인세는 평균 10%다. 1만 원 책이 한 권 팔리면 작가에게 1,000원이 남는다. 꽤 준수하게 판매했다고 하는 수준이 약 3만 부인데 이마저도 운이 좋은 케이스다. 보통 책을 쓰는데 약 1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3만 부를 판매한 작가의 연봉은 3억의 10%인 3,000만 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로서의 전업을 결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하기 위해 그가 쓴 책의 판권을 사겠다는 연락을 준 것이다.

혹시 이 사실을 아나요? 활주로의 길이에 따라서 이륙할 수 있는 비행기가 결정된다는 걸요.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 소설의 영화 판권을 사면서 제게는 활주로가 생긴 겁니다. <잡스-소설가, 마르크 레비>

마르크 레비는 이 사건 이후로 꾸준히 다작하는 작가가 되었고 안정적인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장강명 작가는 번번이 퇴짜를 맞으면서도 꾸준히 도전해 다수의 문학상을 받아 상금과 명성 자본을 마련하였고 정세랑 작가 또한 등단 후 오랫동안 회사에 다니다가 몇 권의 책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꿈을 이루는 것을 달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글쓰기라는 노동의 생산물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창출해주기 전까지는 그저 메마른 사막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 작가는 메마른 사막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결국, 수많은 퇴짜와 퇴고로 성장해야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발표한 소설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대중의 이목을 끄는 기회를 얻어야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영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주 경험한 일인데,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둔 소설가에게는 출판사도 ‘우리 출판사엔 안 맞는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고 달려들지만 주목받는 소설은 매우 적고 등단하는 작가도 손에 꼽는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멸종 위기 수준의 동물처럼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수 많은 소설 중에 자신의 존재감을 고고히 드러내는 작품을 써낸 작가를 기억함으로써 한 명의 소설가가 탄생한다. 작가는 결국 독자라는 이름의 팬이 만든다. 그리고 그 팬들이 작가를 위한 시장을 만든다.


좋은 소설가의 덕목은 무엇인가?
좋은 소설가란 무엇일까? <잡스-소설가>에 나온 작가들의 말을 빌려 얘기해보자면 이렇다.

- 소설가는 사회 안에 ‘잠든 이야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소설가는 독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는 이다.

- 소설가는 읽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에밀 아자르의(로맹가리)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며 꼬마 신사 모모에게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모는 부모 없이 양할머니 밑에서 자란 사내아이다. 모모의 할머니는 수많은 풍파를 견디다 보니 욕쟁이 할머니가 되었지만 언제나 모모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다. 사실상 그녀는 모모를 양육함으로 모모에게 삶을 의지를 하고 있었다. 모모는 자신이 할머니의 보호자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어른의 흉내를 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마흔 살이 넘은 아저씨처럼 의연하게 대처한다. 하지만 그의 서툰 어른 행세에 어린아이의 풋풋한 순수함을 뚝뚝 떨어트려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삶에 대한 의지나 가족에 대한 애정 공동체의 중요성 같은 것을 느낀 것이 아니다. 단지 모모라는 아이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아이와 그가 처한 삶을 공감하고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풍요로워졌다. 이렇듯 소설가는 사회 속에 잠든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고 좋은 문장으로 가꾸어 하나의 소설을 만든다. 그리고 그 소설은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의 스파크를 일으킨다. 이 스파크는 항상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사랑과 공감이라는 감정을 불러오는데 우리는 이 감정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소설가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궁극적으로 읽는 사람에게 ‘사랑’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는 이가 아닐까? 글은 패션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자신의 은밀한 내면과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감출 건 감추는. 소설가들은 자기애와 인류애, 지구 생명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계속 잡아나가며 어쨌거나 계속 쓰고, 좌절하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이게 뭐지? 하는 감정과 맞닥뜨리는 사람들이다. <잡스 - 소설가, 김기창>

작가라면 이 세상 어느 것도 허투루 넘기지 말고 그 안에 잠든 이야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형벌 같아요. 인생을 절대로 단순하게 살지 못하니까요. 평생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저주처럼 느낄 때도 있어요. 가끔 이런 저주 없이 사는 삶이 어떠할지 궁금하지만, 작가이기 때문에 필요한 이 저주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하죠.  <잡스 - 소설가, 로셀라>

소설가는 지금 공기 안에서 무언가를 쓰는 사람입니다.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꾸준히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가 쓰는 글은 이 시대를 감지하고 그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소설가의 윤리 의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갈지는 모르지만, 소설가라면 언제나 지금 시대의 일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때론 조선시대를,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시대에 관해 쓰더라도 그 안에는 현재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게 소설가의 일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잡스-소설가, 김연수>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사랑을 받는 소설가는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및 공감 능력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소설가들이 당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기도 했고요. 그건 그림이나 음악이 하지 못하는 소설만의 힘입니다. 그 힘은 소설가가 지닌 공감의 깊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요. <잡스 - 소설가, 조수용 발행인>


우리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
인터뷰에서 공통 질문으로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작가들에게 던진다.

- 소설은 생각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이들의 삶을 경험케 한다.

- 소설은 평소라면 알 수 없었던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한다.

- 소설은 감정의 진폭을 키우고 세계관을 확장하며 성숙한 삶을 추구한다.


나는 장강명 작가가 말한 소설을 읽는 이유에 가장 공감이 되었다.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건 확실히 소설의 힘입니다.”

언젠가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생활>이라는 글을 읽고 길거리에 나눠주는 전단을 받기 시작했다. 그 책을 통해 전단을 날라야만 하는 그들의 삶에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전단을 받고 그 전단을 휴지통에 버리는 그 수고로움이라는 에너지가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의 어린 자녀들이 저녁을 해결할 수 있는 라면 한 봉지의 값어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킬 때만 받는 편인데 기껏 생긴 공감도 잦은 사회생활로 인해 무뎌지는 것 같다.)이처럼 소설은 옳다 그르다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상황 그 자체를 인식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회의 모든 이슈를 우리가 스토리화 하여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맥락을 파악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등진 채 단순히 뇌로 인입되는 말초적인 자극에 반응하여 화를 내 거나 확증 편향을 갖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공감만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삶을 경험할 수 없다. 시간은 한정적이지만 새로운 경험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용과 불과 검이 나오는 시대로 진입할 수 있다. 먼 미래에 새로운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경험할 수 있고, 피아노 조율사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어 소소한 로맨스도 느껴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살아보기 위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과거의 비극은 역사를 통해, 동시대의 비극은 소설을 통해 경험하면서 우리는 감정과 생각의 진폭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진폭을 키울수록 인간의 삶은 성숙해질 거고요. <잡스 - 소설가, 조수용 발행인>

소셜미디어를 보면, 모든 게 흑백논리예요. 누군가를 감방에 처넣어라!, 멕시코 장벽을 지어라!, 그들을 몰아내라! 등 흑백이 아니라 중간색으로 봐야 할 문제인데 말이죠. 소설을 읽는 행위는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깊어지고 자유로워진다는 걸 느끼거든요. 다시 말해, 중간색을 띌 수 있습니다. <잡스-소설가, 마르크 레비>
 
 제가 기자를 하다가 소설가가 되니까 알겠어요.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건 확실히 소설의 힘입니다. (...)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어느 순간 연민하게 되죠. 그건 소설 말고 다른 분야가 해내지 못하는 일 같아요. <잡스-소설가, 장강명>

소설은 다른 이들의 삶을 경험케 합니다. 인생은 제한적이어서 한 번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가 없잖아요. 소설은 무한한 경험을 통해 당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감성의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일을 맡습니다. 제 생각에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감성이고, 편견과 차별에 맞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잡스-소설가, 로셀라>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격려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품으면 삶이 더 희망적일 것이다.” 소설가는 소설 속 주인공을 격려하며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 미문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은 작가답게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 소설가란  무엇인가? 라는 답에 단순히 소설가는 우리의 삶을 격려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조지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스티븐 킹은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모든 소설가는 서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고 독자는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정의를 발견할 것이다. <잡스-소설가>를 읽고 이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소설가는 그 소설가가 살아가는 시대의 커뮤니케이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는 사람들 또한 동시대의 훌륭한 커뮤니케이터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깊은 문해력을 바탕으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을 읽는 사람 중에 좋은 소설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늘 나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존재가 있다면 좀 더 삶이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제게 달과 별은 그런 존재입니다. 자연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소설가 또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 인물을 늘 격려하는 존재. 그러니 어찌됐든간에 희망적인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을 겁니다. <잡스-소설가,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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