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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아이 Jan 21. 2021

시골아이 이야기 - 청계천 책방 거리

그리움이 깃든 책은 2천 원 비싸다

      

  봄바람이 아직 차갑던 7살 어느 날 아빠와 함께 청계천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생업으로 작은 가내수공업을 하던 아빠는 청계천 일대에 거래처가 많아 구석구석을 잘 알고 계셨다. 그 덕분에 나도 청계천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청계천 만물상     


  빼곡하게 자리 잡은 오토바이와 트럭들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들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어디서도 구경하지 못한 신세계가 있다.      


  재료와 시간만 있으면 탱크 한대쯤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기계 상가와 어둠의 경로로 들어온 일제 전자제품으로 진열장이 빼곡한 전파사들. 미싱사와 그들의 시다들이 골목 구석구석 들어앉아 옷과 신발을 만들고 파는 가게들. 평화시장 상인과 손님이 먹고 내뱉는 골목 식당들과 뒷간의 퀴퀴한 냄새. 머리에 꽃을 단 여인의 엉긴 머리칼 같은 전깃줄. 고가도로 아래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다채로운 기운에는 생동과 음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아빠는 먼저 들른 한 전파사에서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노란색 카시오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터. 나는 새 시계자랑을 하고 싶어 팔꿈치까지 옷을 걷고 걸어 다녔고 아빠는 내 팔을 잡고 본래 목적의 행선지로 끌었다.     


지식의 시작     


  목적지는 평화시장 인근의 헌책방 거리. 우리는 청계천 8가에서 6가까지의 길을 걸었다. 주변 구경거리에 심심하지는 않았으나 7살 아이에게는 힘이 부쳤다. 도착하자마자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있는 한 무더기의 책을 깔고 앉고 쉬었다. 그 옆으로 어른 키 두배 정도의 책이 곡예하듯 쌓여있었다. 곧 신학기여서인지 우리처럼 아이를 데리고 온 어른들이 많았다. 아빠도 나에게 초등학교 입학 기념 책을 사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춥고 힘들어 고르는 둥 마는 둥. 나는 내 옆에 쌓여있던 책의 한 무리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하나는 12권짜리 민중서림 백과사전이었고 하나는 ‘학생과학’이라는 잡지 묶음이었다. 책방 주인과 아빠와의 짧은 흥정 후 두 덩이의 묶음은 곧 아빠의 양팔에 매달렸다. 대충 고른 것 치고는 내용이 좋았다. 저 두 묶음의 책은 유년기 책장 일부분을 지배하며 나의 지식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창조경제를 배우다     


  청계천 인근 고등학교에 진학한 덕에 청계천 헌책방은 예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그 시절의 헌책방에는 책과 참고서가 넘쳐났다. 발에 치이는 게 삼국지 전집이고 수호지였다. 발행된 후 한 번도 서점 진열대에 이르지 못한 책들이 즐비했고 잘만 고르면 어느 1년 선배가 공부한다고 사서 거의 끄적이지 않고 용돈벌이를 위해 내어놓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절반 이하의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거기서 산 모든 책은 엄마에게는 정가에 표시된 새 책 가격으로 보고됐다. 나에게는 그 차익만큼의 용돈이 책과 함께 생겼다. 헌책방은 지식의 창고이자 창조경제의 시작점이었다.     


  좋아하던 영화잡지를 사려면 그 창조경제는 더욱 절실했다. 창조경제로 남은 이윤을 거기에 투자했다. 사정이 넉넉하면 서점에서 새 잡지를 샀고 그렇지 못한 달에는 어김없이 헌책방으로 와 이월된 잡지를 샀다. 옆면에 빨간 페인트로 이월 잡지라는 표시가 달렸지만 상관없었다. 창간호부터 폐간될 때까지의 ‘키노’는 지금도 내 책장에 보물로 남아있다.      

    

학업과 유흥의 간격 메우기     


  헌책방에서 얻은 참고서와 문제집은 나의 수능에 얼마간 기여했다. 나는 꾸역꾸역 대학에 진학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해방감은 대학 새내기를 방탕하게 만든다. 술 마시고 노는데 쓰는 돈의 양은 공부를 위해 들어가는 돈의 양보다 다. 나도 그러했다. 그 간격을 헌책방은 메꿔주었다.      


  헌책방거리의 일부 서점에서는 대학 전공서적을 팔았다. 이때는 보편적 인문계 전공을 선택한 나 자신이 참 좋았다. 책방의 책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면 사회과학 전공서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서적을 찾아 사고 읽고 싶은 책을 다수 건진 날이면 근처 고기 튀김집에서 친구와 서서 먹는 잔술이 달았다.     


그리움이 깃든 책은 2천 원 비싸다     


  직장인이 되고 결혼하고 지방으로 이사 간 후에도 발은 가끔 거기로 향한다. 그 사이 7살 아이는 42살이 됐지만 헌책방들은 점점 젊어진다. 쌓여있는 책들의 나이가 어려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고가도로가 헐리고 청계천이 열리고 평화시장이 리모델링되며 찾아온 변화다.      


  젊어진 책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날도 참여정부나 노무현 관련 책들 여러 권 발견하고 계산대에 내밀었다. 그런데 이런. 다른 책들은 3천 원인데 이건 5천 원 씩이다. 물어보니 노무현 대통령 관련 책들은 비싸다고 한다. 책에 그것을 사는 사람의 그리움이 깃들어 있는 걸 알고 장사하는 이분도 창조경제.      


  그렇게 책 여러 권을 득템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장을 열었다. 누군가의 손을 한두 번 거쳐 나에게 온 책이지만 그 안의 활자는 처음 인쇄되어 나왔을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 권에 5천 원은 발행가에 비하면 거의 폐지 가격 수준이다.      


  봄이 오고 코로나 가면  아이와 함께 들러볼 곳 1순위 청계천 책방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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