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대문 앞 가로등은 꺼지지 않았고 불투명한 창을 덮은 투박한 커튼 뒤에서 빛은 엷게 수런대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얼굴의 윤곽만이 해 질 녘 능선처럼 펼쳐졌다. 오랜 시간 미세하게 달라졌을 그 곡선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숲의 정수리가 만들어 낸 그 선을 따라. 선 아래 촘촘한 나무와 보드라운 흙, 돌과 시냇물, 골짜기에 맺히다 흘렀을 눈물들을 떠올렸다. 능처럼 부드러운 이마와 눈두덩이, 달아나던 콧날과 작게 솟은 입술, 맑은 달빛이 흐르는 혈관들. 속눈썹 안에 숨어 있던 새가 날아올랐다. 푸드덕, 그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감긴다.
밤새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늦은 아침의 햇살은 커튼 뒤에서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202호는 마당에 내놓은 이삿짐처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텔레비전과 그걸 받치고 있는 짝을 잃은 서랍장, 구석에 포개둔 제각각의 이불과 그가 가지런히 개켜놓은 내 코트, 간밤에 마시다만 맥주와 남은 새우깡,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방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내 어지러운 이부자리까지. 구석으로 밀려나다 방 밖으로 사라졌는지 그는 보이지 않는다.
“일출을 보고 왔어.”
“깨우지 나도.”
“내일은 같이 가자.”
“오늘 해는 오늘뿐이잖아.”
우리는 다시 횟집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는다. 주인아주머니가 큰 스텐 볼에 떠주신 김이 나는 생선국이 무슨 생선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고, 바다에게 나는 영영 타지 사람일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움켜쥔 마음이 모래처럼 흐른다. 우리는 나란히 맑은 탕에 맑은 소주를 마신다.
“바다에 와서는 가장 맑은 술을 마시고 싶어. 투명한 햇살이 초록 병을 통과하면 그 빛을 투명한 소주잔에 담는 거야. 잔에서 찰방찰방 맑은 술과 빛이 섞이면 차가운 입술에 잠깐 닿았다가 투명한 목으로 홀짝 넘어가. 그 빛들이 온 혈관을 밝히며 돌아다닐 걸 상상하면 내 몸이 바다 위에 떠있는 윤슬처럼 반짝이는 것 같아.”
내 말을 듣던 그가 반짝, 웃는다.
목적 없이 마을을 걷다가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미끄럼틀을 탄다. 다 자란 그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갔다가 아직 아이였던 그가 내려오며 묻는다.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어?”
“1학년 때 늑목 위에 올라갔다가 돌아 내려오지 못해서 내내 그 위에 있었어.”
그네를 타던 내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냥 거기 가만히 앉아 있었어. 너무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거기 그대로 있는 건 괜찮았어. 선생님은 내려오라고 하고 애들은 밑에서 아우성인데 나 혼자 하늘 가까이에 앉아 있는 기분이 괜찮았어. 난 관성의 법칙에 충실한 사람인가 봐. 정지하면 영원히 정지한 채 있으려 하고 운동하면 계속 그 상태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거. 그게 늘 문제야. 바다를 보면 바다만 보고 싶고, 길을 걸으면 밤새 걷고 싶고, 뭐든 한 번 하면 계속하고 싶어 내내.”
“뭐든 해, 너 지겨울 때까지. 내가 잠자코 있어줄게.”
“가자 그럼, 바다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