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이 말하는 자유
우리는 자유의 근사함에 대해서는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유가 왜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꼭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자유로운 게 좋은 거지!'라고 말할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이하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에 대한 본인의 가치관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통용되는 자유의 의미의 근원이기도 하다.
밀은 동일한 생각과 가치관,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몰아넣는 현대 사회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사회성의 한 특성인 '남과 하나가 되려는 경향'이 자칫하면 '몰개성의 시대'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러한 '남과 하나가 되려는 경향'때문에 우리는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밀은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생각의 자유와 개별성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의 자유에 대해 밀은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개인의 독립성에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다른 생각에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그런 행위가 한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도 해악이기 때문이다.
만약 뉴턴의 물리학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뉴턴에게 침묵을 강요했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져있을 것이다. 한 의견에 대해 그 누구도 잘못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전제하지 않는 한 그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각과 행동이 지금처럼 놀라울 만큼 이성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힘입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 경험만으론 부족하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뉴턴의 물리학조차도 수많은 의문과 시험에 내맡겨져 그 정당성을 확인받은 것이다. 지속적인 검증만이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밀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진리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든 놓치면 안 된다.
검증의 문이 열려 있으면 언젠가 우리가 이성을 통해 더 높은 진리에 이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
이때 불가피하게 생각의 차이가 생기는 분야에서는 상반된 두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에 진리를 찾아야 한다. 도덕과 인간을 둘러싼 각종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악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자유롭게 온갖 논리를 동원해서 자기주장을 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잘못된 의견이 확고해지면 위험해지고 나쁜 영향을 준다. 그러나 참된 생각의 경우 그 의견이 확고해지면 환영할만한 일이 아닐까?
한 의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한 동시에 필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현상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어떤 한 진리를 더 생생하고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아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
대게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확정된 결론은 깊은 잠에 빠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진리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의견은 현재로서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으나, 후에는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과 의견의 자유를 보장하고 단 한 명의 의견일지라도 무시하지 않아야 하며, 토론을 통해 검증의 과정을 거쳤을 때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까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의견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중대하게 연관되지 않는 일에서는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고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개별성을 잃게 된다.
개별성이 중요한 이유는 개별성이 존중되지 않고 세상 또는 주변 환경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간다면, 원숭이의 흉내 내는 능력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선택하는 사람만이 자기가 타고난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살아갈 경우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억압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많은 시설들(학교와 군대 등)에서는 여전히 개별성은 억제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방식이 통제하기 수월하고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데 탁월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욕망과 충동이 나쁜 게 아니다. 이 또한 신념과 자제 못지않게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충동이 강하다고 해서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양심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고 더 다양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이 더 풍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대체로 좋은 일을 할 가능성이 더 큰 셈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개별성이 존중되고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만이 개선이 이루어진다.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만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독립적인 개선의 요소가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밀은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간단명료한 원리를 제시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harm)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에 따르면 당사자에게만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 본인 스스로 내린 결정과 마음먹은 목표를 사회가 끼어들어 번복하는 것은 그릇된 사정 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타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밀은 이에 대해 또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역사가 처음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이 숱하게 실험해보고 나서 나쁜 것으로 결론 내린 것, 다시 말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어느 누구의 개별성에도 유익하지 않고 또 적합하지도 않다고 밝혀진 것은 금지하는 것이다 좋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충분한 실험을 거쳤으면 도덕적이거나 사려 깊은 진리로서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 시대의 조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바로 그 절벽에서 후손들이 또다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막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다."
결국 어떤 행동이 다른 개인이나 공공에게 명백하게 해를 끼치거나 아니면 해를 입힐 위험성이 분명할 때, 그 행동은 자유의 영역에서 벗어서 도덕이나 법률의 적용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자유는 우리 삶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톱니바퀴 중 하나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는 죽은 사회나 다름이 없으며, 생각의 자유와 개별성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편한 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며 개인의 의견과 개별성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자유를 귀찮은 일로 치부하고 관습과 전통에만 얽매여 다수의 의견만을 따라갔다면,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들을 사이비로 몰아갔다면 우리 사회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 뒤, 불경과 부도덕이라는 죄목 아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그의 철학과 강좌를 통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부도덕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예수는 불명예스럽게도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죄목은 어이없게도 신을 모독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 사회가 '자유'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제2의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유의 의미를 알고 이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할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