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 바꾸기』(김지승, 낮은산)를 읽고
올여름도 지치고 무력했다. 무더위는 매년 힘들지만 -기후 위기라는 현실도 더해져-무기력의 차원이 이전과 다른 듯. 탁한 물속에서 맥없이 이리저리 떠밀리는 기분이다. 현실 감각이 희미하고 자주 멍해지면서 의욕도 사그라졌다. 불현듯 “깡충 늙었”(『술래 바꾸기』, 174쪽)다고 느낀다. 몸과 마음이 점점, 가파른 기울기로 쇠락하겠구나.
무력한 와중에 구(區)에서 기획한 ‘여성 구술생애사’ 작업에 구술 채록자(우리 구에 오래 거주한 여성을 인터뷰하여 기록함)로 참여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작년에는 아흔넷 여성을, 올해는 일흔여섯 여성을 만났다. 두 분 다 입담이 좋고 활기가 넘쳤다. 신기하고 서글픈, 시리고 따스한, 안타깝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올해 만난 일흔여섯 구술자는 돼지 두루치기를 요리해 경로당 ‘여성노인’들을 대접한 일을 즐겁게 회상했다. 여름내 소화불량에 시달려 매운 음식도, 고기도 부담됐지만, 두루치기 이야기는 식욕을 자극했다.
우연히 소개 글에 실린 ‘여성노인’들의 말에 이끌려 『술래 바꾸기』를 읽기 시작했다. 책은 총 1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의자, 수건, 안경, 가위처럼 생활 속에서 심상하게 접하는, 소용 있고 사소한 것들. 여기 쓰인 이야기들 몇은 처음에 <여성과 오브젝트>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여성과 오브젝트가 연결되고 욕망하고 합일하고 분열되어 결국 각각 아름답게 존재하게 되는, 세계가 잠시 오작동하는 순간들의 재구성”이라며, “둘 사이에는 뚜렷하게 실감되는 슬픈 힘이 있다”(https://www.ildaro.com/9144)고 말한다.
여성과 오브젝트를 연결해서 보는 방식은 내게 낯설고, 그 문장의 밀도와 (주로 여성노인이 무심한 듯 던지는) 촌철살인의 말들 덕에, 나는 자주 멈추고 문장을 곱씹고 장면을 그리다 뭉클해지고는 했다. 사물을 매개로 ‘나’와 특별한 여성들이, 어떤 시공간이, 웃기고 슬픈 이야기들이 넘나든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정신없이 이야기를 쫓다 보면 묘하게 하나로 꿰어지면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야기로 완결된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나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읽을 때마다 꽂히는 이야기가 달라질 듯), 아무래도 여성노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남는다. 무덤 앞에 의자를 (어쩌다, 그것도 세 개나) 갖다 놓은 사연이나, 말수가 적은(자신의 개하고만 소통하는) 마을 최고령 정순 씨의 중요한 무엇을 찾느라 열하루를 모여 비빔밥을 먹게 된 사연(일명 ‘단추 비빔밥’) 등. 아아, 너무 좋잖아. 별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눈이 촉촉해지는 경험을 한다. “송이버섯” 같은 여성노인들이 모인 “구름마을”은 그대로 판타지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큰 기척 없이 이 세계의 작고 약한 것들을 연결하는 데 기여하는” 이들, 한 사람이 오래 술래인 걸 못 보는 이들의 이야기. 술래는 돌아가며 해야 재미난 법.
‘단추’라는 챕터에는 ‘불안을 여미는 방식’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내 무력은 불안에 기인할 때가 많다. 책의 모든 이야기를 통해 마음이 다독여진다. 함께 찾아낸 작은 단추로 옷이 여며지고, 흔들리는 모빌의 조각들이 “서로를 의지해 균형을 잡”는다. “이쪽에서 기울면 저쪽에서 솟아나는 춤을 추듯” 살리라는 기대를 품는다.
책을 읽고 ‘쇄락(灑落)’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다.
“더 한참 후에야 쇠락과 쇄락의 의미들이 나이 듦의 양면성을 비유하는 것처럼 읽혔다. 우리는 상실 이후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헤어졌지만 마담 J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이 듦은 쇠약하여 말라 떨어지는 일방향의 쇠락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자유롭고 깨끗해지는 쇄락을 동시에 내재하는 과정이라는 것.” (181쪽)
나는 필연적으로 쇠락하겠지만 동시에 쇄락을 꿈꾼다. 나이 듦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새롭게 연결되고 결국 아름다운 존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