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발생하고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이 확산하여 가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벌써 겨울이라는 계절이 두 번씩이나 찾아왔다가 떠나려 한다. 그런데도 하루하루 넋 놓는 시간은 나를 지난 시절로 자꾸만 돌아가게 한다. 나이를 먹게 되면 옛 시절이 더 자주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젊음의 뒤안길을 더듬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내가 되고자 했던 꿈은 매번 바뀌어 영화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이었다. 어린 시절 서부 영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되어 팝송을 즐기며 따라 부르던 모습, 태권 유단자가 되었을 때 해외로 나가 태권을 보급하고자 했던 꿈들. 이들 모두 이루지 못한 꿈들이었지만 대학 시절 중학생들을 가르친 과외 경험으로 선생님이 되는 마지막 꿈을 그렸다. 뭔가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절이었다.
중학교 시절이 눈에 선하다. 내가 좋아했던 수업은 영어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선생님은 꼭 그날 배울 내용의 본문을 칠판에 전부 써서 색분필로 밑줄을 쳐 가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곤 했다. 나도 미리 배울 내용을 노트에 전부 써서 학습 시간에 똑같이 색깔 볼펜으로 정리를 했다. 나중에 영어 선생님께 칭찬과 더불어 노트 작성 대회에서 상도 탄 기억이 아직도 뿌듯하다. 가끔 영시도 소개해 주며 해설해 주시던 자상스러운 모습과 열정으로 가르쳤던 그분을 그려보기도 한다.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특별한 명구 하나도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 ‘Don’t put off until tomorrow what you can to today.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이 구절을 늘 칠판에 써 놓고 강조하셨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나를 이끌어 준 이 명구가 나의 인생길을 정해 준 이정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직분!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교직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으니까. 가끔은 샛길로 빠질 경우도 있었지만.
오늘 할 일을 오늘 해야 내일이 힘들지 않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불편한 그 마음은 할 일을 해야 해소되고 끝이 난다. 어떤 일은 격하게 안 하고 싶고 끝까지 미루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날그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 조금 나은 것 같다. 할 일을 미루기보다는 오늘 그냥 하자. 이런 생각에 나는 매일 일기를 써왔다. 지금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일상이 똑같아 쓸거리가 별로 없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가 자주 떠오른다. 특히 코로나 19의 재확산이 정점을 치닫고 우울할 때. 삶의 권태로움과 무력감 그리고 상실감을 느낄 때 또한 그러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시를 음미하며 희로애락이 점철된 내 인생을 되돌아보곤 한다.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런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미래의 기쁜 날을 향한 소망을 간직할 것을 권유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오늘도 지난 추억의 기억 속에 머문다. 인생은 추억을 먹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인 모양이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코로나 19 팬더믹 시대의 불확실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나의 처지요 형편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무사무려(無思無慮)로 지내고 있다. 추억을 떠올려 안주하면서 마음을 또다시 반추하는 삶이다.
그래도 ‘오늘 하고자 하는 일은 오늘 끝내고, 내일 일은 위안거리로 내일 생각하자.’ 더불어 ‘카르페 디엠. (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