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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씨당 김소영 Mar 28. 2023

갑을관계는 돌고 돈다

영원한 갑은 없다. 정말 일 잘 하는 갑은 을에게 잘한다.


사진과 글은 무관합니다



필자의 직업은 캘리그라퍼. 글씨 공연을 하다 보면 정말 갖가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비가 오는 야외이거나 무대가 없다거나 관객이 없는 상태에서의 공연.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을 거야 같은 생각이 드는 곳에서 수많은 작품을 공연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먹물과 빗물을 함께 범벅해 완성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바람을 맞으며 바람의 방향대로 먹을 튀겨가며 마친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마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나에게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들은 몹시 처량하지만 한편으론 극적이기도 했다.


행사라는 것은 주최하고 여는 이가 있고 거기에 참여해서 펼치는 이가 있다. 보통 여는 이가 갑이고 참여자가 을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이며 금전이 오가는 일이라 서류상의 표현에도 등장하는 지칭이니 으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공공기관의 경우 갑을 관계가 아닌 상호 동등한 입장으로 계약을 하기도 한다. 갑을이란 계약서 상에 계약자들을 단순히 '갑'과 '을'로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관용적으로 '갑'을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약자를 지칭하고 '을'을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약자를 지칭하게 되면서 갑을관계란 단어는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통한다.


여하튼 여러 종류의 갑이 있다. 수많은 갑을관계 계약에서 나는 항상 을로 일했다. 지위가 낮은 내가 관찰한 갑 썰을 풀자면 갑도 갑 나름이다. 다 같지 않다.


똑똑한 갑은 대기 공간을 마련해 주고 음료와 간식을 챙겨주며 주차 문제를 걱정하지 않게 배려한다. 무대의 크기나 구조물의 설치를 위한 거리 측정, 조명 음향부터 관객과의 거리를 고려한 구성, 리허설 때 작은 동선까지 체크한다. 일단 전담하는 담당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깐깐하며 가끔은 이런 것까지 챙겨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귀찮게 굴지만 그런 태도 덕분에 변수 없이 무대를 잘 마칠 수 있게 된다. 그런 갑질(?)은 황송하다.


정말 최악의 경우는 멍청한 갑을 만난 경우다. 간혹 대행할 능력이 있긴 한 건지 의심되는 자들이 있다. 현장에서는 어떤 말도 티도 내지 않지만 섭외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흐름이나 장비 및 어떤 사인물만 봐도 가늠이 된다. 일단 가장 황당한 상황은 무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대기 장소도 없다. 그런 상황을 미리 알리지 않는다. 조명도 음향도 없는 무반주다. 나를 왜 섭외한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행사. 아마도 그들 또한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시간적 여유, 금전적 상황, 관계적인 이유 등. 급하게 준비하느라 섭외도 구성도 진행도 그냥 모든 것이 헐겁고 빈틈이 가득하다. 이런 자에게 섭외된 나라는 자에게도 어떤 의구심이 들게 된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지만 기본만 해도 반은 가는데 을을 대하는 태도나 말에 존중마저 없다. 우선 본인들이 우왕좌왕 하느라 정신이 없고 현장이 어수선하다. 개중에는 외양만을 보고 나를 판단해 희롱하거나 더러운 농담을 일삼는 미친 자들도 있다. 아주 극히 드문 경우고 믿기 힘들겠지만 아직도 그런 자들이 있다.


행사를 여는 곳. 정확히는 행사를 대행하는 곳은 대행을 맡긴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사를 만들기 위해 어떤 목적을 갖고 을을 섭외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그 고객을 만족시킬 을에게 최소한의 마땅한 대우를 하는 것이 일의 성공을 위한 기본적인 태도 아닐까? 그건 너무 을 위주의 생각인가. 하긴 돈을 주는 그쪽에서는 섭외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들에게 대행을 맡기는 고객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갑을 관계는 돌고 돈다. 영원한 갑은 없다. 정말 일 잘 하는 갑은 을에게 잘한다. 그게 결국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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