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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자 Feb 24. 2021

내 방에서 움직임 감지센서를 발견했다.

스마트홈과 한층 '더' 교묘할 판옵티콘에 대한 생각


새로 이사 온 사택 천장 모퉁이에 박힌 동그란 것에 시선이 꽂혔다. 평소에 별 대수롭지 않은 것에 호기심 갖는 것이 습관이지만 얼핏 보면 CCTV 같이 생겨서 그런지 유독 신경 쓰였다. 가만 보니 내 움직임에 맞춰 '삑삑' 하찮은 소음을 내고 꺼림칙한 빨간빛을 송출하기까지 했다. 방에서 혼자 책 읽으며 페이지를 넘길 때나, 조용한 아침 운동 시간에 내 스쿼트 동작 변화에 일일이 반응하며 추임새를 넣는 '이 자식'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 자식'의 정체, 움직임 감지센서 CPA-0212

이리저리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용도인 것이며, 무슨 원리로 움직이나 싶어서 '이 자식'의 몸통에 적혀있는 브랜드를 결국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코맥스(Commax), 어딘가 낯익은 이 회사는 주택 및 시설 보안 관련 IoT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된 많은 제품들을 둘러보며 '이 자식'과 똑같이 생긴 녀석을 찾겠다고 사진들을 대조하는 내가 좀 웃기긴 했으나 한 번 호기심을 자극한 이상 멈출 수 없었다.


너무나 간단명료한 설명에 좀 당황했다. [출처: COMMAX 홈페이지]




마침내 찾게 된 '이 자식'의 이름은 움직임 감지센서, CPA-0212. 구체적인 용도와 활용도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기대했으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형태, 속도, 크기 등 제품의 특성만이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있었다. 실망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처럼 불쾌함을 느꼈던 사람이 있진 않았을까 하고 각종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았다. '오피스텔에 왜 이런 게 붙어있을까요?'  '센서 신호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궁금해요' 등 심심찮게 나와 비슷한 언짢음을 호소하는 게시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대부분 2020년 하반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최신 이슈임은 분명했다. 신축건물에 기본 탑재되는 것 같다며 도무지 가정집에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어떤 이의 비판에 크게 공감하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동작 감지 센서', '열전 감지 센서' 등의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를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었던 '이 자식'의 역할 및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동물 및 인체에서 발산하는 원적외선을 감지하는 형태로 동작을 감지하여 신호를 출력한다. 외부인의 무단 침입방지를 위해 공동주택 및 기타 시설에서 방범용으로 설치한다. 최근에는 독거노인 및 취약계층의 고독사 예방 차원에서 센서를 설치하여 일정 기간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을 시 자동으로 보호자나 중앙관리실에 신고되는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움직임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가 신호정보로 환산되어 입주자인 나를 거치지 않고 어디론가 전달된다는 사실이 굉장히 꺼림칙했다. 내 움직임을 감지하고 처리한 정보가 보안 따위의 목적으로 관리실이나 경찰서 등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인데 움직임만 감지되는지 영상정보까지 전달되는지 알게 뭐람. 취약계층 대상 사회복지서비스 제공 및 시설 보안 측면에서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툭하면 '보안 강화', '편의 증대' 따위의 키워드로 역효과를 간과하는 마케팅 수법들에 언짢은 기분을 느꼈던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검색 이후에도 영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적당한 크기의 상자로 그 위를 엉성하게나마 덮어버렸다. 더 이상 내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 자식'에 묘한 승리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정말 엉성하기 짝이없는 장치. 어쨌든 내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데 만족했다.




나는 내 방이 판옵티콘의 감옥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 내가 끝내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까닭은 이 센서를 보자마자 불현듯 내 머릿속에 '판옵티콘'이 스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내 방이 판옵티콘의 감옥이 될까 봐 두려웠다. 지금껏 내게 사진 한 장으로 신선한 지적 충격을 전해준 몇 안 되는 것들 중에 하나가 판옵티콘 구조도였다. '모두 본다(Pan-Opticon)'의 뜻을 가진 판옵티콘은 공리주의 철학자이자 변호사 및 법학자였던 제러미 벤담(1748~1832)이 고안한 원형감옥이다. 원통으로 제작된 건물 벽면에 1인 수용실이 빼곡히 박히고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중앙 통제실이 위치하게 된다. 통제실의 익명성은 죄수 개개인으로 하여금 규율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고 이로써 한 명의 감독관으로도 수십, 수백 명의 죄수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 설계도(1791) [출처: 포털검색, '판옵티콘']
설계도를 3D모형으로 구현한 모습. 미셸푸코의 판옵티콘에 대한 해석은 내가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포털검색, '판옵티콘']



판옵티콘을 권력과 통제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에 따르면, 벤담의 판옵티콘은 교도소를 넘어 학교, 군대, 공장 등 효율적인 감시를 필요로 하는 근대 시설에 널리 적용되었고 그렇게 우리 일상을 장악해왔다. 그는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인류사회의 처벌의 역사를 돌아보며 지배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을 양성하고자 신체에서 정신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통제수단이 교묘히 진화해왔다고 밝힌다. 섣불리 처형하거나 고문하여 멀쩡한 노동력을 훼손시키느니 규율과 규범으로 정신적으로 교화 시켜 말 잘 듣는 노예를 양성하는 편이 생산성 측면에서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생애주기에 맞춰 각종 규율과 규범으로 무장한 판옵티콘들이 사회조직이라는 이름으로 공고히 자리 잡게 되고 자유분방한 인간들의 무의식을 장악하여 충직한 노동력으로 탈바꿈시킨다.




스마트홈은 가장 은밀하고 개인적인 내 '사색의 공간'을 엿볼 수 있다.

IoT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스마트홈의 조성은 무규범 지대의 최후 방어선인 '내 집'에 침투하여 더 '얍삽한' 형태 판옵티콘을 탄생시킨다. '내 집'은 바깥세상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비무장지대이자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무한히 보장되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나와 마주하며 나의 존재에 대해 마음껏 사색할 여유를 누린다. 이 진공 상태의 시간은 외부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나만의 잣대를 성장시키고 각종 제약과 규율 가득한 세상과 다시 마주할 양분을 제공한다. 이제는 지루한 클리셰가 되어버린 사생활 보호 내지는 프라이버시가 갖는 나이브한 의미는 위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공간에 익명의 눈이 향하게 된다면? 간단한 시스템 해킹으로 각종 가전에 부착된 센서와 렌즈를 통해  내 사생활이 누군가에게 실시간 청취되는 상황을 상상하는 건 이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굳이 해킹이라는 비합법적인 노선을 택하지 않더라도 합리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방법은 많아 보인다. 최근 구글과 페이스북이 빈민가 대상 사회공헌 활동으로 최신 IoT 기술을 결합한 주택건설사업을 진행한다는데 그것이 단순 봉사활동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마 어린이도 쉽게 짐작할 듯하다.




스마트홈의 편의성을 강조하는 광고 [출처: 포털검색 '스마트홈 광고', LG U+]



가장 편안한 상태의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불쾌한데 심지어 수집된 정보들은 어디론가 전달되어 알고리즘의 형태로 내 의사결정에 무례하게 영향을 끼친다. 대개 재화나 서비스의 구매와 관련된 것인데 인간 심리와 결부된 교묘한 마케팅 기법으로 내 자존감, 즉 정신 영역까지 침범한다. 주저함, 망설임과 같은 깊은 생각은 비효율로 치부해버리며 즉각적인 의사결정을 자꾸만 재촉한다. 그렇게 사색의 공간과 시간을 빼앗겨버린 채 가정 내 각종 디지털 기기를 통해 지배질서 유지에 필요한 행동양식을 꾸준히 세뇌받기만 한 인간은 사실 인간이라기보다는 좀비, 혹은 노예에 가깝다. 빠른 전파(5G)와 가정 내 사물과의 연결(IoT 기술)을 통해 스마트홈이라는 이름의 수용실을 상시 감시함과 동시에 수 만 km 떨어진 각 수용실들을 동일한 질서로 통치하는 거대한 판옵티콘이 완성된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효율적인 통제수단이 없다.



판옵티콘에 '적응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낯설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판옵티콘이 작동하기 위한 핵심은 죄수들이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환경에 결국 '적응'하고 규율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움직임 감지센서를 가리기 위해 붙였던 내 상자 덮개는 이내 허무하게 떨어지고 말았고 어느새 나는 다시 붙이기 '귀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성가시게 했던 '삑삑'대는 소음과 빨간빛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고 더 이상 내 성미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익명의 눈이 감시하고 있을지 모르는 그 환경에 나는 어느새 적응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상태 그대로 무기력하게 놓여있는 상자 덮개를 멍하니 쳐다보다 문득 이 환경에 적응한 나 자신에 놀라며 이 글을 적게 되었다.



판옵티콘의 디스토피아적 예견을 비판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올 법한 소설이라며 일축하거나 대중에 의한 역감시를 의미하는 시놉티콘을 간과했다며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나날이 가속도가 붙는 기술발전 속도에 맞춰 시놉티콘이 대중적으로 작동하려면 우리가 판옵티콘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음을 우선 인식하고, 그러한 환경에 무비판적으로 '적응당하지' 않기 위해 일상을 낯설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는 디지털 사회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방법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라이브로 송출되며 무의식을 조종당하는지 모른 채 헤벌쭉 웃는 멍청이로 살고 싶진 않은데 이를 위해 남은 인생을 부단히 피곤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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