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역사, prologue
작년 봄,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아주 특별한 게스트를 축제에 섭외했다. 바로 성우 이용신 님! 90년대 생들과 함께 투니버스 전성기를 만들어낸, 옛날 옛적 추억의 만화 ‘달빛천사’의 ‘루나’와 ‘풀문’ 목소리의 주인공인 바로 그분 말이다.
어릴 적 90년대생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했던 풀문의 노래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동의 여파는 달빛천사 OST 발매 펀딩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대성공. 펀딩 하루 만에 기존 목표액이었던 3300만 원을 훌쩍 넘은 4억 원을 달성했고, 최종적으로 26억을 모금하는 데에 성공했다. 크라우드 펀딩의 새 역사를 쓴 셈이다.
펀딩의 성공 속에는 이화여대 공연으로부터 시작된 화제성, 이용신 성우님의 기획력 등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달천이들의 달빛천사에 대한 강력한 니즈가 주요했을 거다. 이제는 2030 세대가 된 만화 ‘달빛천사’의 팬들, 소위 ‘달천이’들이 달빛천사에 지갑을 연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다시 풀문의 목소리를 듣고
간직하고 싶어진 걸까.
자세한 이유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다양한 이유의 저변에는 공통적으로 그 옛날 달빛천사를 좋아하며 느꼈던 ‘감정’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감정’의 기억은 강하다. 알츠하이머 학회(AS)와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치매환자들이 경험한 일 자체는 잊더라도 그 경험에 따른 감정은 유지된다고 한다. 한 번 느낀 감정은 암묵적인 기억 속에 남아 오래오래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것’이 있을 거다. 그건 닮고 싶은 연예인일 수도 있고, 가족과 함께 보던 드라마일 수도 있으며, ‘달빛천사’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좋아함의 대상은 각기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무언가에 푹 빠져있었다.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고, 더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쓰고, 때로는 누군가와 싸우기도 했다. 별거 아닌 정보에 열광하고 초조해하고 기뻐하고 울며 출렁거리는 감정을 누구나 느껴보았을 거다. 그리고 이 감정은 때론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다소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도 지갑을 열게 하고 몇 번이고 영상을 되돌려보며 추억에 젖게 만든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끈덕진 감정, 무언가를 깊이 좋아하고 사랑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집중력, 그것의 지대한 영향력.
나는 이런 감정의 여정을
‘덕질’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덕질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최근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덕질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연상된다. 덕질의 대척점에 서있는 단어가 현생(현실 인생)인 것을 떠올려보면 그 부정적인 이미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다. 덕질을 ’현실을 외면하고, 과하게 몰입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 그래서 굳이 ‘덕질’이란 표현을 쓰는 거에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을 거다. '좋아하는 것', '관심사', '취미' 등 다양한 표현이 있다는 것도 알고 '덕질'이 몽글몽글한 감정들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어감도 이미지도 드센 면이 있다는 점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질'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데에도 내 나름의 이유도 있다.
첫째는 무얼 좋아했냐 보다는 그저 좋아했다는 행위에 좀 더 오롯이, 좀 더 강하게 집중하고 싶어서이다. 무엇을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른 감정보다 우위에 서있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관심사나 취미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행동보다는 그 대상에 집중된 것 같기에, 넘치는 감정들의 파도를 표현할만한 표현은 덕질이 유일무이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행위가 다소 흑역사처럼 느껴지고 나만의 것 같고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정에 충실하자는 의미이다. 애니메이션 음악을 좋아했든 고상하게 클래식을 좋아했든 모두 다 덕질이라는 이름 하에 평등하게 대할 것을 선언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서브컬처든, 남들이 상위층의 유희라 부러워하는 고급진 취미든 상관없이 모두 다 '덕질'이란 표현으로 평등하게 다루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어떠하리 아무튼 모든 감성 이성 제쳐놓고 흠뻑 빠져들었다면 모두 '덕질'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 정도와 방법이 달랐을 뿐, 모두가 덕질의 경력이 있는 덕후라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구든 어느 순간 무언가를 좋아한 적이 있을 테니까. 왜냐면 세상에는 좋아할 것들이, 폭 빠져 인생을 낭비할 만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가장 출렁거리던 감정의 동요를 한 번 꺼내보자.
웃고 울던 그 시절 감정들은 고이고이 서랍 속에 간직하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것들이니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행복해지는 법은 없으니까. 한 번 사는 인생 이왕이면 최대한 방탕하게 살아야지. 오감에는 돈이 들지만 감정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떡볶이를 먹고 맛있다는 희열을 느끼나 값비싼 호텔 파인 다이닝을 먹고 희열을 느끼나 그 감정의 크기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평등하다.
아마 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이만 가지의 덕질이 있을 거다. 각기 다른 덕질의 역사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철저하게 초등학교부터 쌓아온 가늘고 긴 내 덕질 경력을 기준으로, 내 중심의 덕질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10년 잡덕의 소소한 덕질 이야기를 읽는 순간, 각자에게 남은 감정들의 기억을 되짚어볼 시간이 되면 좋겠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흔한 덕후의 추억팔이이다.
<참고>
1. http://m.moneys.mt.co.kr/article.html?no=2016010311048019589#imad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