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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May 04. 2020

올해 그 꽃밭에는

남겨진 자들에게 남겨진 것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꽃 사진을 많이 찍는 거라고 한다.

오래간만에 폰에 담긴 사진을 정리하다가 보면 풀이나 나무, 꽃을 찍어 놓은 사진이 전보다 눈에 띄게 많아진 것에 이따금씩 나도 놀란다. 


꽃 사진이 아니더라도 나이 먹은 증거는 수두룩하고 

이와 관련된 크고 작은 해프닝들은 헛웃음 나올 정도로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유독 꽃 사진이 많아진 것은 단순히 노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지난 몇 년 간 자연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나 삶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인 듯싶다.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찬란함을 챙겨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도 나이 듦의 증거라고 한다면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나이를 먹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일 테니.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등졌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상과 작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도 그렇고 

죽음이라는 비극이 그 압도적인 숫자에 묻혀서 보통날의 뉴스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며 이 죽음이 더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올해 맞이한 꽃들은 그래서 더 특별하고 소중했다.

제한된 동선 안에서의 짧은 외출만 허락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길었던 겨울 문턱을 넘어 찾아온 

이 봄이 기특하면서도 조금은 서먹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인간들의 격리는 자연에게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차지했던 해변에 거북이들이 올라와 알을 낳고,

쉴 새 없이 다니던 배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돌고래가 돌아왔다.

울릉도에는 멸종된 줄 알았던 강치가 나타났다.

인적이 사라진 아프리카의 길 위에선 야생동물들이 낮잠을 자고 있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도 몇 년 만에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봄날이 연일 이어졌다. 

4월의 청명한 하늘은 이제 더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며 우울해했던 작년 기억이 떠오른다. 



치명적인 인류의 위기상황이 자연에게는 치유의 기회가 된 역설의 예이지만

이렇게라도 자연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소식들에 나는 무척 기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스스로 망치고 잃게 된 자연의 모습들이 떠올라서 화가 치민다. 



길에 나가보면 여기저기서 나처럼 꽃 사진 찍는 사람들을 쉽게 만난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는 돌연 이렇게 말하고 싶어 진다.  


'그래요. 꽃은 언제나 그렇게 예뻤답니다. 주변의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보도에 심어놓은 꽃들도, 저 산의 나무들도,

플라스틱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바다도,

그 안에서 짧은 생을 살다가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오는 바다의 생물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먹거리로서 사육되는 동물들도


모두가 꺾지 않고 눈으로 보아야 하는 꽃들처럼

아끼고 지켜야 할 자연의 부분들 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자연은 멀리 떨어진 침묵의 공간이 아니다.



올봄, 겨울의 끝을 알리며 피어난 꽃들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자연은 아무도 우리를 돕지 못할 때에도 평화와 위안을 선물한다.


우리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행위의 결과들이 어떻게 삶의 지형을 바꾸어 놓는지 여러번 경험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을 때 자연이 어떻게 회생하는지, 그 변화는 또한 얼마나 놀라운 것인 지도 보았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역병의 광풍 속에서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다시 주어진 일상 앞에서 '남겨진 자들의 책임' 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 혼란의 시간 동안 

우리가 떠나보낸 이웃들과 오랜만에 재회한 또 다른 이웃들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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