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현 Jun 22. 2022

능력주의, 새삼스러운 주목과 비판

능력주의가 논란이 된 배경과 대안에 대한 보론


능력주의를  설파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으며, 능력을 기준으로 차등 대우를 해야 공정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초등학생 때였던가? 기억을 더듬으니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묘하게도 어떤 유명 세계사 학습 만화의 한 페이지다. 공산주의 국가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다가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게 돼서 망한 것이고, 자본주의 국가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능력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니까 사람들이 능력을 개발하고 열심히 일해서 번영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노력한 만큼 보상해 주는 것이 공정하다든지, '1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그러니 그 1명의 천재를 길러 내고 존중하고 잡아 둬야 한다는 이야기다)든지 하는 말은 무슨 속담마냥 잊을 만하면 나온다. 사실 딱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에 널리 배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학교교육에서 능력주의적인 원리와 방식은 굳이 말로 강조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시험으로 점수와 등수를 매겼고, 결과를 공개 게시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칭찬이나 꾸중을 듣곤 했다. 시험 결과가 나오면 성적이 좋은 학생을 교사가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모습은 초등학교 때부터 일상이었다. 우리는 능력주의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학교생활 속에서 '이 세상 돌아가는 방식'으로 학습했다.


고등학교에선 대학 입시가 목전으로 다가오자 동기 유발을 위한 능력주의 프로파간다가 곧잘 이루어졌다. 한 교사는 자기 동창 중 소위 명문대에 간 사람이 1달에 얼마를 번다며, 자기도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지금 열심히 입시 공부를 하라는 훈계를 했다. 한 교사는 잠을 줄여 코피 흘리며 공부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입시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독려하곤 했다. 다른 고등학교에서는 "네 성적에 잠이 오냐", "30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 같은 급훈을 걸어 놓았다는 사례가 이슈가 됐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기억나는 것은, 시험 때마다 감점된 점수만큼 엉덩이에 매질을 가했던 영어 교사이다. 점수(능력)가 나쁠수록 더 많은 폭행을 당했던 영어 시간은 차별을 몸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그때도 그 교사는 맞기 싫으면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매를 많이 맞는 것은 공부를 안 한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 사이에 가정 환경의 격차가 어떻다거나 학원·과외 교습을 얼마나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없다. 학교에서는 학업 성적이 오롯이 자신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것처럼 얘기됐고, 환경의 격차 같은 얘기가 언급되더라도 결국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노력과 능력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가르침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고, 그 대표 격으로 시험 성적에 따라 대학이, 학과가, 직업이 갈리고 사회적 인정과 경제적 소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사람을 능력에 따라 불평등하게 대우해야 사회가 효율적으로 돌아간다고 믿었고, 노력 또는 성과에 따라 보상해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배웠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스스로 하루 12시간씩 고통받으며 공부했던 시간이 의미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공정한 능력주의'라는 오래된 꿈


시험 성적으로 매질을 당했다는 일화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내 경험담은 최근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2006년 2월이니,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초·중·고에서의 경험인 셈이다. 1980년대 입시를 비판하며 자살한 고등학생들의 유서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같은 말들이 기록되어 있던 것을 보면, 한국 교육의 이러한 풍경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 전반에서 능력을 입증하는 지표로 간주되던 학력(學歷)에 따른 차별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 대다수는 학교에서 크고 작은 능력주의를 경험하고 체화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요즘 청년들이 ‘공정한 경쟁’을 신봉하고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며 새삼스럽게 호들갑 떠는 이야기들은 문제를 잘못 짚고 있다. 능력주의는 최근의 청년들이나 특정 세대의 가치관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이자 사고방식이었다. 능력주의는 무한 경쟁의 교육 체제로, 학력·학벌주의와 소득 격차로, 각종 고시의 신화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로 상징되는 승자독식과 출세주의로, 비정규직 차별이 공정한 경쟁의 결과라고 지지받는 세태로,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에 대한 특별 전형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그 마각을 드러냈다.(이전에도 여러 학자들이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와 연관지어 이런 현상들을 비판, 분석했다. 예를 들어, 박남기, 2018, 《실력의 배신》, 쌤앤파커스; 이경숙, 2017,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강준만, 2015,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인물과사상사; 오찬호, 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장은주, 2017,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피어나 등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단지 현 체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의 자리를 함께 차지하는 이중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현실이 아닌 바람직한 목표로서 거론되어 온 '오래된 꿈'이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공정한 능력주의에 이르지 못한 후진적이고 불공정한 곳으로 인식되었고, 비리, 연고주의, 정실주의, 패거리 문화, 그리고 각종 기회의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능력주의에서 기인한 차별과 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온전하고 이상적인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되돌아오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학력·학벌 차별을 없애라는 요구가 학력 없이도 특출난 능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게 하라는 것으로 해석되거나, 고용 및 승진 과정 등에서 '학력·학벌이 아닌 진정한 능력'을 보는 것이 이상적인 목표라고 여겨지기 일쑤였다.


세대에 따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에 차이가 난다면, 그건 어쩌면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림잡아 현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능력주의가 다분히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었던 데 비해, 그보다 이후에 한국 사회에 태어나 살아 온 사람들에게 능력주의는 어느 정도는 현실화된 체제였던 것이다. 단적으로 중학교 취학률은 1990년 90%를 넘어섰고 고등학교 취학률은 1994년 겨우 80%를 달성했다. 1985년의 고등학교 취학률은 64.2%에 불과했다.(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 현황 시계열 조회.

  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1520)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 환경이나 여타 이유로 중등 교육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흔했던 셈이다. 능력주의의 기본 전제인 형식적 교육 기회의 평등도 1990년대 이후에야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더하여 민주화 과정을 통해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각종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관행과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혁파, 개선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의 10-30대 상당수에게 능력주의는 당위적 가치인 동시에 이미 현실에 가까운 세계관으로 수용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들은 능력주의에 어긋나는 듯 보이는 것에 덜 관용적일 수 있다. 물론 젊은 세대가 한국 사회가 곧 능력주의 사회라고 믿는다는 이야긴 아니다. '수저계급론'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소득 및 자산의 불평등과 세습에 대한 문제의식도 병존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의 일부 영역은 그래도 능력주의에 부합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수치화된 시험 성적이나 그 결과로 얻게 된 학력, 자격증 등의 스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전면화된 배경


최근 들어 능력주의 그 자체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비판이 부각되고 있다. 사실 능력주의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했을 무렵부터 이미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함께 제기되고 있었다.(예컨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조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진 마이클 영의 책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는 능력주의가 전면화되었을 때 나타날 근본적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1958년 출간되었다.) 이제야 우리 사회가 그러한 주장에 좀 더 주목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능력주의 비판이 주목받게 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능력주의가 일부 실현되었고 능력주의 논리가 매우 전방위적이고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탓이다. 능력주의와 공정성의 이름하에 소수자를 공격하는 모습, 차별 시정 조치에 반발하는 흐름, 경쟁의 패자를 모멸하는 현상, 그리고 능력 자체가 출신 배경에 영향을 받아 세습된다는 자료 등을 접하면서, '완전히 능력주의적인 사회'가 기대한 만큼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경각심이 커진 것이다.


능력주의의 논리가 전면에 대두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워진 상황이 있다. 부동산 등 불로소득이 증가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뚜렷해질수록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가진 자'의 집단에 들 방법을 찾게 된다. 안정적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서열화·차별화를 위한 논리가 부상한다. 사람들은 학력과 시험에 의한 경쟁과 선발이 그나마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고 계층 상승의 기회가 되어 줄 거라 믿으며, 능력주의와 공정성의 이름으로 이를 유지, 강화하려 하는 것이다. 


‘공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자신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는 것이다. 
김혜진(2020), 〈차별받는 노동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능력주의와 불평등》, 교육공동체 벗, 177쪽.


또한 공동체의 해체나 시장화의 진전은 능력주의를 견제하거나 보완하던 요소들을 약화시켰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하던 지역공동체나 가족공동체도 빠르게 무너졌다.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도 위축되었다. 연대와 평등의 감각,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신뢰, 변화에 대한 정치적 전망 등은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소실되어 갔다. 사회가 지나치게 능력주의 일변도로 작동하게 되는 것을 견제하거나, 때론 능력주의 원리의 맹점을 보충하곤 했던 담론과 기반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자기계발론과 자기책임론 그리고 능력주의가 득세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근래 능력주의 담론을 떠받치고 있는 대중의 정서는 낙오에 대한 공포,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정 이상의 소득과 학력을 갖춘 중상류층은 능력주의에 기대 자신들의 기득권과 우위를 지키고자 한다. 그보다 낮은 계층에서는 능력주의가 제대로 시행되어야만 자신들도 조금이라도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믿으며 이에 동조한다. 개인이 노력하고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사회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얻을 거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것으로는 불평등은 누적되고 격차는 더 벌어진다. 그리고 좁아지는 문과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 피로감과 불안도 한층 더 심해진다.


누가 줄을 세우려 하는가


이처럼 능력주의가 해답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능력주의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의견은 다수를 차지한다.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논거 중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은 대안이 뭐가 있냐는 것이다. 가령 "능력에 따라 분배하지 않으면? 인맥이나 출신으로 하자는 건가? 능력주의가 그나마 낫다"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자본주의-능력주의 체제가 최선이며 다른 대안은 없다는 순응, 불평등과 경쟁은 어쩔 수 없다는 냉소가 깔려 있다. 또한 한국 사회의 특수성 중 하나로 낮은 사회적 신뢰 속에서 인적 개입이 최소화되는 지필 시험 같은 형태가 아니면 비리나 불공정이 의심된다는 우려도 한몫 거든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주장들은 단지 분배의 기준을 개인의 능력이 아닌 다른 요소와 방식으로 치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능력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해악과 능력주의에 의해 공고해지는 불평등을 지적하며, 더 철저한 능력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결코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해법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 '(학력과 시험 성적으로 증명되는) 개인의 능력을 대체할 다른 선발과 분배의 기준'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보다는 그러한 서열화와 선발의 방식 자체를 특정한 영역으로 한정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원하는 노동자를 선발할 합리적인 방식과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해당 기업이나 조직이 할 일이지, 온 사회가 나서서 거기 맞는 능력을 계발하고 공인된 평가 결과를 제공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다. 특히 공교육의 영역에서는 능력주의적 원리를 퇴출하고 시험 성적에 의한 서열화와 차별을 없애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은 필요치 않다.


능력주의와 공정성 논의가 주로 '어떻게' 줄을 세울 것인지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주장은 '왜' 줄을 서야 하는지를 묻고 필수적이지 않다면 애초에 줄을 세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누가' 줄을 세우려 하는지, 대체 누구의 기준에 따라 줄을 세우는지를 따져 묻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과정이 공정했는지, 결과에 승복할 만한지가 아니다. 능력주의적 경쟁과 차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과연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고 행복한 곳으로 만드는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능력주의 원리에 따른 경쟁과 차별이 어떤 불행을 낳는지는 많은 이들이 이미 입시경쟁교육 등을 통해 충분히 겪어 보지 않았던가.


물론 능력주의는 개개인의 이념이나 사고방식만의 문제가 아닌 체제의 문제이기에, 능력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종합적이고 명확한 방향의 정책들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학력 차별 등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학교가 평준화되어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서 어떤 일을 해도 생존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직종과 고용 형태와 기업에 따른 소득 격차도 줄어들어야 한다. 즉,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과 사회 변화는 차별과 불평등을 줄이고, 평등과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값어치를 매기던 일종의 신분제를 멈추고, 능력을 차별의 이유가 아닌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능성이자 다양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그려 봐야 할 때이다.





※ 《복음과 상황》 367호(2021년 6월)에 실었던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학이 모두의 권리가 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