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은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습니다. 바로 전 리뷰작품이었던 <쇼생크탈출>,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액션영화의 한 획을 그은<스피드>, 브레드 피트의, 브레드 피트에 의한,
브레드 피트를 위한 영화 <가을의 전설>, 팀 버튼의 가장 특이한 작품< 에드우드>, 코미디 영화의 궁극
이라 할 수 있는 <마스크>, 애니메이션에서는 <라이온 킹>이 개봉했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
각하면 어떻게 저런 작품이 한 해에 개봉했는지 소름이 돋습니다. 그 해 할리우드는 상업성뿐만이 아니라
작품성면에서도 최고였을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 개봉한 영화 중 다음해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품은 <포레스트 검프>였습니다. 6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관왕(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시각효과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화제는 66회에 이어 톰 행크스가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이전의 톰 행크스는 <스플래쉬>와 <빅>에서 인기를 얻어 차세대 할리우드를 이끌어갈 배우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의 초창기 영화 중 한 편인<빅>은 톰 행크스라는 배우의 매력을 느끼실 수 있는 영화이니 꼭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이 후 <터너와 후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거쳐 <필라델피아>에 이르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에이즈에 걸린 변호사역을 연기했던 톰 행크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다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그 영화가 바로 오늘 리뷰할 영화인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서 2년 연속 수상은 그것도 주요부분중 하나인 남우주연상을 2번 연속으로 받는 다는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처음있는 일이 아닐까생각합니다. (틀릴
수도 있으니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
하지만 이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할 만큼 <포레스트 검프>에 대한 평가는 굉장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
식에선 <포레스트 검프>의 독무대나 다름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저런 영화들과 경쟁을 했는데도 말
이죠.
감독에 대해서 잠깐 이야길꺼내보자면 로버트 저메키스입니다. 그의 이름은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아시는 이름이겠지만,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 긴 설명 필요없이 그가 한 작품을 언급해보겠습니다.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 <죽어야 사는 여자>, <백투더 퓨처>, <콘텍트>,
<캐스트 어웨이>, <폴라 익스프레스>가 그가 연출한 영화들입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그의 최전성
기라 할 수 있는 시절입니다. 그 중 최고의 절정기를 찍게 해 준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절정의 연기와 연출력을 보여준 톰 행크스와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 리뷰 시작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영화를 다 보셨다는 전제하에 리뷰하므로 수많은 스포가 있는 점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개인의 견해가 주인 리뷰이므로 내용이 허접하고 영화 해석상 억측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시작은 너무나도 유명한 오프닝으로 시작합니다. 하얀 색 깃털이 바람에 날려 포레스트 검프
의 운동화에 내려앉습니다.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의 살아온 인생을 다루고 있고, 그 속에 미국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본게 25년 전이었는데 지금 나이에 다시 보니 영화의 느낌은 새삼 달랐습니다.
감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엔 서정적인 음악, 포레스트 검프의 순수성, 그리고 플롯이 거부감없고
따뜻하게 다가왔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느 덧 포레스트 검프의 나이가 되서 영화를 보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인가? 에 몰입하면서 보게 되더군요.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따뜻한 영화만은 아닌 미국사회의 성찰을 다룬 스펙트럼이 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시작 배경이 되는 곳은 미국 앨라바마주입니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회
비판의식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앨라바마는 미국남부의 주로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곳입니다.
주인공인 포레스트 검프라는 이름부터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극 중에서 어머니는 포레스트를
남북전쟁 당시 KKK단을 이끈 포레스트 장군에서 따왔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가끔 이해하지못할 멍청한 짓을 한다고하면서요. 그리고 검프의 뜻은 멍청이라는 뜻이죠. 포레스트 검프가 태어난 곳 그리고 그의 이름, 그리고 불편한 신체에서 미국의 역사와 그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저변에 미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의미가 깔려있다면 영화의 전면엔 포레스트 검프가 운명을 헤쳐나가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포레스트 검프는 선천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로 나오는데요. 하물며 포레스트는
걷는 것조차도 기구가 없인 불가능한 아이입니다. 누가봐도 절망하고 자신의 인생을 원망할만도 하지만 포레스트는 순순히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순수한 아이입니다. 극 초반에 나온 흰 깃털처럼 말이죠.
오히려 그 주변인들이 육체적으론 정상일진 모르지만 포레스트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모습에서 누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건지 의문이 들게합니다. 포레스트 어머니는 검프가 정상 기준보다 밑이라는 말을 듣고 되묻습니다.
“정상의 기준이 무었인가요?”
포레스트 검프는 어머니의 열정적인 교육의지로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처음 학교가는 스쿨버스안에서
서로 포레스트에게 옆자리를 주지 않으려는 아이들. 포레스트는 차별을 담담하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제니라는 여자아이기 포레스트에게 옆자리를 내주고 그 둘은 친구가 됩니다.
제니는 신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괴롭히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시도 아픔을 가지고
있는 아이입니다. 알콜중독인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극의 진행은 포레스트
1인칭의 나래이션으로 진행이 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잔인한 현실이나 사건을 지능이 모자란 포레스트의
나래이션으로 브리핑되다보니 풍자가 곁들인 블랙코미디 성격도 지니게 됩니다. 가끔은 다큐등의 직접적
문제의식 고발보다는 이런식의 풍자가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제니와 포레스트는 친구가 됩니다. 너무나도 다른 둘이지만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도움을 주는데요. 포레스트가 주변 친구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 포레스트를 위해 외칩니다. “뛰어 포레스트” 그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포레스트가 달고있던 보행기구를 박차고 뛰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의 메타포는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미국사회에 대한 전후 진보적 세대가 보내는 각성촉구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포레스트는 스스로 걸을수도 뛸 수도 있게되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첫 운명을 이겨낸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어 중 하나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포레스트에게 했던 대사 중 ”인생은 초코릿상자와 같다. 무엇을 고를지 모른다” 이란 대사가 있습니다.
포레스트의 운명은 굳이 비유하자면 쓴 맛의 초코릿을 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레스트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겨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달리기로 대학교를 들어가며
이후 전미미식축구대표팀에도 들어갑니다. 그 후 포레스트는 군대에 입대해 베트남 파병을 가게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것이 포레스트 검프에겐 특별한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한 것 뿐입니다. 그리고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이와 대척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제니입니다.
제니는 아버지와 떨어져살다 포레스트처럼 대학을 진학 후 플레이보이의 모델이 되면서 퇴학조치를
당합니다. 제니는 강제로 플레이보이지를 촬영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니의 성향은 포레스트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질서에 도전적이고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
을 바꾸고자 합니다. 포레스트처럼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입니다. 가수가 되서 유명해지겠다는 꿈 말이죠. 하지만 제니의 현실은 꿈과 점점 멀어집니다.
어떻게보면 자유주의적이며 현실에 비판적인 제니는 실패하고, 사회시스템안에서 안주하며 성공을
거듭하는 포레스트를 보며 이 영화가 보수주의 성격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포레스트의 인생을 살펴보자면 그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행기구를 끼고 걷던 포레스트, 하지만 제니의 외침으로 그의 한계를 뚫고 달려나갑니다.
이후 대학에 입학해 미식축구선수가 되고, 군인이 되어 월남전에 파병하지만 파병은 곧 위기일 수 있었
습니다. 전쟁터에서 전우를 살려내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이를 위해 포레스트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제니가 현실을 부정하며 방황할 때, 포레스트는 그 운명을 받아들였고, 그 운명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점을 봤을 때 이 영화가 보수주의 성향의 영화로 보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한 명의 캐릭터가 더 등장하는데요. 바로 댄 테일러 중위입니다. 월남전에서 병사와 지휘관으
로 만난 둘은 부상 후 선명한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차를 드러냅니다.. 댄 테일러 중위는 선친들이 모두 미국과 관련된 전투에서 전사한 명예로운 군인 가문입니다. 다리가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 오히려 자신을
살려준 포레스트를 저주합니다. 자신은 자기 부대원들과 명예롭게 죽었어야할 운명이라면서요.
그러면서 두 다리가 없는 자신의 무가치함에 분노를 느낍니다.
이후 댄은 의병전역을 하게 되고, 다시 홀로 남겨진 포레스트는 우연히 탁구를 접하게 되고, 탁구에 재능을
보인 포레스트는 탁구선수가 되서 성공하게 됩니다.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의 모든 사건들은 특징을 가지
고 있습니다. 바로 “우연히”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포레스트는 어떤 꿈이나 목표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알어난 것이고, 그것에서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정 또한 우연성을 띄진 않습니다.
포레스트는 최선을 다했고, 때론 목숨을 걸었습니다. 무모할 정도로 말이죠. 포레스트에게 정해진 운명따
위는 없었습니다. 댄 중위가 말한 것처럼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면 알라바마에서 평생 보행기구에 몸을 맡겨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저능아로 살고 있었을 것 입니다.
어머니의 말 처럼 인생에선 어떤 초콜릿을 고를지 알 수 없습니다. 우연히 그것을 골랐지만 최선을 다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첫 오프닝이 기억나실 겁니다. 하얀 깃털이 여기저기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때론 누군
가의 어깨위에 앉았다가 다시 차량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포레스트의 신발에 내려앉습니다.
깃털의 움직임처럼 인생은 원하는데로 가지않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깃털
같이 가벼운 개인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들속에서 살아왔고 극복하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에 떨어진 힘 없는 깃털 하나가 포레스트 검프의 신발에 내려앉듯이,
흰 깃털은 마찬가지로 세상에 떨어진 순수한 포레스트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만 같습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이 영화는 이런 서정적이며 아름다움이 있는 영화인 반면 다른 모습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미국 현대사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바침하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의 이름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볼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포레스트 검프라는 이름에서 미국의 원죄가 느껴집니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유토피아를 꿈꾼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
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그들의 땅을 뺏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뺏은 땅에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성장했습니다. 이런 원죄가 포레스트 검프라는 이름에 내면화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미국의 부끄러운 원죄의 역사를 꼬집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중간중간에 미국의 역사적 사건들이 TV를 통해 나오는데요. (미국의 흑역사에서 대중문화까지) 이것을 통해 미국의 현대사를 그 어떤 과장이나 변명없이 중립적 위치에서 보여줍니다.
제니(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과 비판)와 댄 중위(월남 패전과 전쟁의 상처 그리고 치유)도 미국의 모습을 투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제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묘지에 태어난 해가1945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945년은 미국현대사에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바로 1945년 2차 대전 승전해입니다. 즉 제니는 전쟁 후 미국의 모습이 투사된 캐릭터 같습니다. 전후 미국은 풍요로운 경제번영을 누리며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경제 번영으로 인해 각 가정마다 TV수상기가 놓여지고 대중문화의 꽃을 피우는 시기였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자라난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관습적 도덕이나 사회 통념, 가치관을 부정하며 그들의 자유분방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표면화된것이 히피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월남전에서의 패배는 미국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댄 중위가 전쟁 후 자괴감에 빠지듯이 말이죠. 폭풍우속에서 댄 중위가 외치던 그 모습이 상처받고 초라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듯 합니다. 물론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댄의 모습에서 자기에게 시련을 준 하나님과의 화해이기도 하며 미국의 충격적 패배에 대한 극복으로 읽힙니다.
제니의 죽음은 미국의 방황의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미래를 나아가려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의 상징인 포레스트 검프와 60~70년대 미국사회 방황의 상징인 제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미국의 미래 세대, 즉 희망적인 미국의 은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변증법처럼말이죠.
엔딩 시퀀스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아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는 장면은 인종차별과 전쟁이라는 폭력의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미국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시작과 반대로 깃털이 포레스트 검프를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입니다.
시작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말했듯이 그 사람의 신발을 보면 어떻게 살아온지를 안다고 했습니다.
흙탕물에 젖은 낡은 운동화는 그가 어떤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그의 가방은 그의 인생 여정을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마지막 엔딩은 지금까지이러한 운명을 개척해 온 포레스트의 인생의 마침표가 아닌 쉼표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안겨줍니다. 예전에 교양수업을 들었을 때 한 교수님이 저에게 질문
을 하셨습니다. 좋은 영화란 무었인가? 그 땐 선뜻 답변을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답은 없겠지만 , 이 영화를 보면서 수 많은 정답중에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 인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 내 마음속의 편견을 깰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입니다.
영화 리뷰에서 좀 억측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하실 부분도 많을 것 입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해석이니 그냥 듣고 흘려주세요. 이상 영화 <포레스트 검프> 리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