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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히 Jul 15. 2020

14 덴마크에 온 지 다섯 달, CV 들고 집을 나섰다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샤워로 몸과 마음을 정비하고 테이블에 앉아 유리창 너머 비가 쏟아졌다가 갰다가 하는 걸 지켜봤다. 전날 밤,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잤는데도 흐렸다 갰다를 반복하는 날씨 따라 내 마음도 변덕을 부렸다.


6월 말, 본격 휴가철에 접어들자 많은 게 완화됐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지만, 그저 흘러가버린 것만 같은 지난 5개월이 아까워서라도 계획했던 일들을 하루빨리 이루고 싶었다. 때마침 직접 방문해 CV를 제출하라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그간 상황이 안 좋았었던 것뿐이니까 상황이 나아지면 바로 계획했던 대로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다. 막 도착했을 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 그 마음가짐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안 그 많던 자신감도 침식을 당했는지 겁부터 났다. 내 안에 끓고 있던 그 무언가가 두려움에 서서히 식어간 느낌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혼자 시내에 나가는 것도, 레스토랑에 들어가 CV를 내고 오는 것도 생각만 해도 겁이 났다. 그 틈으로 오늘은 집에 있는 게 나으려나 하는 안일한 마음이 또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늘마저 집에 있으면 패배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스마트폰이 뜨거워지도록 찾아봤던, 워홀러 직업 구하기 영상을 다시 돌려봤다. 낯설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가기만 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용기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차피 안 되고,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 속에 갇힌 기분이다. 오늘이 아니면 영영 갇혀버릴 것만 같아 우비를 챙겨 집을 나섰다. 


내가 알던 시내가 맞나 싶었다. 10년 가까이 서울에 살면서 명동에 가본 게 한 손에 꼽을 만큼 사람이 붐비는 걸 싫어하는데 오늘 시내 모습이 꼭 명동 같았다. 현지인뿐 아니라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인접한 국경에서 넘어온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안 그래도 떨리는 마음에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식당마다 테라스엔 사람들로 가득했고 모두가 CV를 내러 온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이 정도면 병인가. 슬프게도 내가 실제로 느낀 감정이 그랬다. 그냥 돌아가진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CV를 내고 돌아왔다. 매니저가 없어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찾아본 동영상에 의하면 채용 담당자가 직접 받지 않는 이상 99%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의 목표는 이뤘으니 됐다.


긴장감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집에 와서도 펴지지 않았다. 그대로 소파 위에 누웠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었나, 이럴 거면 왜 오겠다고 한 거지, 몇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이럴 줄 몰랐겠지, 여기 있을 자격이 있는 걸까, 이렇게 1년을 날리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같이 사는 사람이 퇴근을 하고 집에 왔다. 소파에서 흐느적대고 있는 나를 보며 큰일을 해냈다고 위로한다. 벌벌 떨던 모습을 곱씹으며 나는 왜 이모양인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거면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큰일을 해냈다고 하니 큰일을 해낸 사람이 됐다. 남은 6개월, 내면이 소란스러울 때마다 떠나기 전 다짐했던 목적만 잊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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