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 처음 온 건 2020년 2월이었다. 퇴사는 19년 3월에 했고, 입사는 17년 3월에 했었다. 대학 졸업은 16년 8월이었다. 2011년부터 16년 8월까지는 대학생이라는 신분 하에 탱탱볼마냥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세상에 부딪혀볼 수 있었다. 처음 인생의 큰 위기를 느낀 건 취업 준비를 할 때였다. 사실상 16년 2월부터 본격 취업 준비를 했으니 취준 기간은 약 1년 정도였다. 인생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꼽으라면 그 1년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하곤 했는데 덴마크에서의 6개월이 그 기록을 깼다.
2020년 2월 덴마크, 덴마크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나의 정체성을 잃었다. 무료 덴마크어 어학원이 재개된 8월 전까지, 집에만 있었던 나는 같이 사는 사람의 같이 사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공백기에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했던 나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두 달이 지났을까, 내 꼬라지를 두고 볼 수 없어 책을 더 많이 읽고, 글도 더 많이 썼다. 유튜브 채널도 만들었다. 여전히 같이 사는 사람 없이는 장을 보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도, 대중교통을 타는 것도 무서웠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했고,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했다. 꾸준히 글을 쓰다 보니 브런치 메인에 몇 번 걸리기도 했고 나의 유튜브 채널엔 21개의 동영상이 남았다.
2020년 10월 말 한국, 워킹홀리데이 기간을 몇 개월 남기고 한국에 돌아와 6개월을 머물렀다. 9개월 동안 살면서 얻은 건 고작 낯선 나라에 대한 친근감이 전부였다. 처음 덴마크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탱탱볼처럼 튀어 오를 것이라 기대했다. 그것도 세계를 무대로! 한껏 쭈글해진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든 생각은 '롱디도 괜찮지 않을까?'였다. 덴마크에서 같이 사는 사람의 같이 사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비록 떨어져 있더라고 경력을 살려 회사로 돌아가는 게 더 좋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면서 당시 준비하던 동거인 비자가 지원조차 불가능해졌다. 비자 발급이 재개될지 지켜보며 회사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일을 시작해 여전히 일을 하고 있던 친구들은 나약한 생각 말고 다시 돌아가 기회를 잡으라며 일침을 놓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못다 이룬 워홀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오덴세 시내에 있는 모든 카페에 이력서를 뿌리리라 의지를 불태우며 커피 클래스를 수강하고 카페에서 일하며 먼 미래를 대비해 한국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2021년 5월 덴마크, 덴마크로 돌아오자마자 동거인 비자 신청을 했다. 처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할 때,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30% 정도였다면 (워낙 불안감이 높은 사람이라), 동거인 비자를 신청할 때는 60%까지 올라갔었다.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이었다. 어떤 신이 도우셨는지는 모르나 신청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동거인 비자가 나왔다. 그렇게 같이 사는 사람과 최소 몇 년간은 같이 살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마음가짐도 사회 분위기도 작년과 달랐던 덕에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파트타임 잡을 구할 수 있었고, 어학원 수업도 다시 들으며 한 단계 더 높은 레벨의 덴마크어 자격증도 취득했다. 무급 인턴십에도 살짝 발을 담글 뻔했으나 다년간의 회사 짬밥으로 똥물은 가볍게 피했다. 그해 겨울, 마음은 가볍게 양손은 무겁게, 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2022년 1월 한국 그리고 덴마크, 12월부터 1월까지 한 달 중 2주는 격리하고, 남은 2주는 7개월 동안 못 본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같이 사는 사람과 서울 데이트도 즐겼다. 덴마크로 돌아온 1월 둘째 주부터 8월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아이엘츠 점수를 만들고, 석사 지원 서류를 준비하고, 한국사 자격증을 딴 이유였던 국가 장학금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비자 문제에 잠시 머리가 지끈했다가 무사히 해결하고, 돈도 꾸준히 벌었다. 눈 떠보니 석사 시작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시 튀어 오를 때를 앞두고 자신감이 바람 넣는 구멍 사이로 피식- 피식- 새어나가고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글로 정리해 본다. 나의 덴마크 연대기랄까.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할 것이라는 불변의 법칙을 다시금 되새기며, 힘들 때 이곳으로 와 바람을 넣고 다시 튀어 오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