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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 '아름다움과 분노' 의 선율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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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 사는 마을의 아름다움을 말하려 합니다.

저도 너무도 할 말이 많아서 밤을 새워서 말할 수 도 있지만 사람들은 남을 욕하고 헐뜯는 언어에만 익숙해져 있어 가지고 제 말이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여러 혁명의 선언서에 쓰여 있는 인간의 천부적인 존엄이나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여러 조형물이나 구조물 또는 언어적 성취물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단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거리와 공원의 일상의 아름다움을 말하려 합니다.

저의 말이 너무나도 심심하고 그야말로 일상적이어서 남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준비할 때 저는 신이 납니다.

지난 3월 첫째 주에 제가 사는 초등학교에서 1학년 신입생들의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70살이 넘은 노인인데, 해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구경을 갑니다. 봄볕이 가득한 운동장에는 우리 마을의 젊은 어머니들이 1학년 신입생들을 데리고 모여 있었습니다. 젊은 아버지들도 몇 명 왔습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낯설어하는 기색도 없이 서로 친구가 됐고 젊은 어머니들끼리 금세 친해져서 수다를 떨고 깔깔 웃었습니다.


젊은 교사들이 아이들과 손을 잡고 둥글게 대열을 이루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봄볕 속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찬란했고 학교 운동장은 야생하는 꽃밭처럼 피어났습니다. 그 생명의 꽃밭은 설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이 본래 스스로 그러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젊은 어머니, 젊은 아버지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아름답다. 인간은 이 아름다움은 의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자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 날은 제 노년의 날들 중에서 기쁜 날이고 저의 기쁨을 남에게 말해주고 싶은 날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대입 재수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은 그 청소년들의 형성기에서 가장 힘들고 긴장되는 날일 것입니다. 이 시험은 전국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일렬로 세우는 시험입니다. 수능시험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무자비한 경쟁에 틀 안으로 편입시키는 제도입니다. 이 시험이 끝나면 언론들은 문제의 난이도를 분석하고 성적을 예측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는데 이때 시험을 치른 청소년들은 또 한 번 지옥을 통과합니다.


저는 대입수능시험을 치르는 날마다 아침에 동네학교 문 앞에 나가서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청소년들을 구경합니다. 어른들의 제도 안으로 별 수 없이 끌려들어 가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 자식들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학교 문 앞에는 2학년 학생들이 새벽부터 몰려와서 가스불로 커피를 끓여놓고 어묵을 벌려 놓고 꽹과리를 때리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고3 선배들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고2 학생들이 고3 수험생들 끌어안고 등을 두들기면서 "형 시험 잘 봐! 파이팅 파이팅! 우리 학교 천하무적 올백 올백!" 올백은 100점 맞으란 얘긴데 다 올백을 외치고 있었어요. 고2학생들은 고3 수험생들 시험 잘 보라고 응원하고 있지만, 이 수능은 점수 1,2점 차이로 우열을 가려서 줄을 세우고 성적에 따라서 차별을 메기는 시험이기 때문에 다들 시험을 잘 봐서 점수 나쁜 사람들이 없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시험 잘 보라는 응원의 말은 참 무력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능시험날 학교 정문 앞에 모여서 고3을 응원하는 고2 학생들은 눈물겹게도 예뻐 보였습니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도 사람의 아뜰, 딸들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 고2학생들도 내년에 별 수 없이 고3이 되어서 고2 학생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고사장안으로 들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슬프고도  또 기뻤습니다. 수능이 다 끝나고 다시 학교에 가보니까 한 아이가 운동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집에 안 가고 머리를 무릎에 기대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애는 아마도 시험을 망친 아이겠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 아이는 돌아가지 않고 있더군요. 저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야 괜찮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다 어른들이 잘못한 거다. 꼰대들이 잘못했다. 아마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겠죠.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그 아이에 그 슬픈 어깨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니까 공부에서 풀려난 동네 남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와서 축구를 하고 있더군요. 추운 날인데도 남학생들은 짧은 바지에 웃통을 벗고 달렸습니다. 골을 넣으면 길길이 날뛰고 끌어안고 좋아했고, 손홍민 흉내 내서 카메라 찍는 그 골 세리머니를 했어요. 골 넣은 아이들 뿐 아니라 같은 편 애들은 모두가 손홍민 흉내를 내면서 좋아했습니다. 달리는 아이들 머리에서 보니까 찐빵집처럼 김이 올랐어요 김이.


입에서도 하얀 김이 막 나왔어요. 아이들의 머리통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니까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 김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은 질문으로 성립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김은 본래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이 아름다운 거지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김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힘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그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힘은 증명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끌어안고, 키스하고, 볼을 비비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내 청춘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지금 세종로 네거리에 가 보면, 여러 정당에서 써붙인 현수막들이 있잖아요. 온갖 욕지거리, 악다구니, 저주, 악담, 증오, 상소리, 가짜 뉴스 다 써붙여 놨어요. 그걸 보면 나는 저게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가를 생각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는 참 구제하기가 어려운 쓰레기통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아마 여러분도 대게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지금도 그 현수막이 가득 차 있어요 광화문 온 동네에, 그런데 그 현수막 아래서 젊은 남녀가 키스를 해요.

광화문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을 못 참아서 키스를 하고 신호등이 바뀌면 건너가는 거예요.

그거를 보면, 야,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이 저렇게 살아서 육체로 살아서 생명으로 가득 채워 살아 있으니까 아직 희망이 있구나. 저런 썩어빠진 현수막 밑에서도 저렇게 키스를 하는구나. 하는 기쁨이 있어요 나한테. 그렇다고 내가 거리에 키스를 장려하는 건 아니에요. 권장하고 그렇게 많이 하라는 것은 아닌데. 일단 그렇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인정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젊어서 등산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높은 산에 못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을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죠.

공원 벤츠에 앉아서 햇빛을 쬘 때 저는 제 몸과 마음으로 행복을 느껴요. 저의 호흡과 세포의 구멍마다 햇빛이 들어옵니다. 나와 태양사이에 아무런 차단이나 장애물이 없이 태양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을 느끼죠.


이럴 때는 내 몸과 우주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내 몸과 마음이 우주의 공간과 일치되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행복은 늙은 사람만 알 수 있는 행복이에요 여러분은 아직 몰라요. 그게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행복감이 시간과 공간에 가득 차기 때문에 이게 살아있는 존재에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에서 꽃이 피고 새잎이 돋는 나무를 바라보는 기쁨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식물 속에 어떤 생명의 원리가 작동되고 있길래 꽃들이 저렇게 무수한 색깔과 형태로 표현하는지를 인간은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꽃 안에 어떤 에너지가 있길래 그렇게 다양한 꽃이 피는지 인간은 몰라요.

내가 식물학 전공하는 내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모른대. 그거는 알 수가 없는 거래 그리고 지금 아는 거를 물어봐달라고, 아는 거를 물어봐, 모르는 걸 좀 몰어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안 물어보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꽃이 그렇게 도대체 무슨 원리가 있길래 그렇게 아름다운 모양과 색깔로 다양하게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증명할 수가 없고 물어봐도 대답을 못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가 있어요.

그렇죠? 보면 그게 아름다우니까. 이것은 참 인간 생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태풍이 오면 다 무너져 버리잖아요. 사람이 지은 빌딩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도로가 무너지는데 그날 아침에도 공원에 나가 보면 까치집이 안 무너지고 있어요. 안 무너져. 높은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서 안 무너져. 그 안에 까치가 들어가고 깍깍 짖고 있어요. 그거를 보면 참 강력하고 아름다운 존재로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어요. 내가 또 물어봤어요. 동물학자한테요. 야, 까치집은 왜 안 무너지냐. 사람이 지은 집은 다 무너져가지고 엉망진창이 됐는데 왜 까치집, 저렇게 엉성한 게 왜 안 무너지냐 그랬더니, 그것도 참 아는 거를 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마 까치집이 안 무너지는 이유는 내가 잘 모르고, 까치집이 떨어진 거는 한 번 봤어요.

땅에 덜어지는 거. 무너지지는 않았어. 깨지지 않게 떨어진 거예요. 이게 봤더니, 어떻게 됐냐 하면 그  몸이 닿는 안쪽 있잖아. 거기는 아주 섬세한 내장재로 했어요. 겉에는 거친 나무토막을 어서, 자기가 자기의 새끼 알에서 까는 새끼를 보호 가기 위해서 그 안에 이렇게 부드러운 재료로 해놓았어요, 내장재로.


그거를 보니까 까치도 인간하고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이 자연 속에는 아무런 윤리적 의미나 도덕적 의미가 없는 거예요.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거를 증명할 수가 없어요.


자연은 영원히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수억 년 동안 들어왔다 나가잖아요. 그 수억 년이 계속된다고 해서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윤리나 도덕적인 의미가 발생하지는 않는 거예요. 그 물리적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그런데 이런 그 물리적인 환경이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잖아요.


이것도 우리 생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생명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죠. 이 문제는 나는 더 이상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것은 누구한테 물어보면, 또 야 아는 걸 물어봐라 이렇게 되니까.


그런데 아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속에 그 같은 자연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성질이 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외계에 있는 자연을 보면, 거기에 공감하고 감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막연히, 증명할 수는 없어요, 물론. 없지만 그것은 내가 경험할 수는 있는 것이죠. 이것은 과학, 내가 말하는 과학적 지식은 아니에요. 증명할 수가 없지만 나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것이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죠.


나는 그런 느낌, 그것을 경험하는  만으로도 만족할 수가 있는 사람이죠.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또 집단과 개인 그리고 여러 먹이 사슬의 단계가 너무나 적대적이에요. 먹이 사슬의 관계가 이렇게 적대적인 시대를 나는 칠십 평생에 처음 봤어요. 먹이 사슬의 관계가 적대적이라는 것은 먹이 사슬이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이 단계가 다 적대적이에요.


저놈이 먹으면 내가 못 먹는 거야. 저게 못 먹어야 내가 먹을 수가 있는 거야, 저게 많이 먹으면 내가 조금 먹는 거야 이 관계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대적으로 돼서 서로 뜯어먹고사는 거예요.


그리고 이 학교폭력의 문제, 요새 문제가 되어 있잖아요. 학교폭력은 정말 이것은 심각한, 이것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다 파괴하고, 그 생애를 파괴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정치권으로 아까 이야기했듯이 증오의 언어를 남발하는, 이 정치권이 증오와 저주의 언어를 계속 쏟아내면 언론들이 그거를 받아서 쓰니까 확성기를 통해서 수백 배, 만 배로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사태를 보고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성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꽃을 보고 기뻐하는 거하고 똑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그런 것을 보고 느끼는 분노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행복감이나 그 근원은 같은 것인 것이죠.


 우리가 인간의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고 거기에 분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그런 것을 보고 느끼는 분노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행복감이나 그 근원은 같은 것인 것 이죠. 우리가 인간의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고 거기에 분노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거기에 그것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이 고귀하다고 말하잖아요.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업적이나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품이나 무슨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이 위대하다고 고귀한 것이 아니고, 그 인간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가 존엄하고 고귀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권의 문제, 생명의 문제 이런 것을 우리는 보편적 가치라고 하잖아요.

인류, 어느 인류에나 해당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그 보편적 가치가 이런 개별적인 현상, 개별적인 구체성, 개별적인 인간속에서 개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 보편적 가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인간한테. 그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인권은 우리는 다 평등하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의 구체성 속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떻게 법조문 속에서 관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그 인권일 뿐이에요.


그 보편성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이나 생명을 말할 때는 개개인의 구체적 개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죠.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각성 그리고 이런 생명을 억압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 그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아름다움과 거기에 그것을 억압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 이것이 결합되어 있을 때 그것은 더 큰 함성으로 번져나가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함성입니다. 시민들이 다 같이 질러대는 함성. 시민들의 함성. 더 코러스 오브 시티즌. 이게 없으면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혼자서 아무리 내가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시민들의 함성이 이렇게 울려 퍼질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선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인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요. 그리고 그 합창의 선율은, 합창의 주된 선율은 아름다움과 분노라는 것입니다.


합쳐서 합창을 만들어요.


그래서 내 오늘 말의 주제는 아름다움과 분노입니다. 제 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_세바시 1644회 강연 중에서>


[ 하남시 김희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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