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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햇 Jan 29. 2024

고군분투 북미의 회색빛 겨울나기

조금은 힘든 인디애나의 겨울


   어제부터 할 일은 산더미인데 마음이 붕붕 떠서 좀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도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 부지런을 떨어보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쉽사리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잠시 의무를 놓고 마음이 어디로 자꾸만 뜨는지 관찰해 본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수렴하는 곳이 있었으니 - 여행이다. 전혀 새로운 곳에 가서, 마치 하루의 의무가 놀고먹고 새로운 구경 하는 게 전부인 사람처럼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나투어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유튜브로도 이 도시, 저 도시 근사한 스팟들과, 드론으로 촬영한 대자연 풍경, 이런 것만 검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또 한 번 물어본다.

   이제 학기 겨우 3주 차가 지난 시점인데 유난하게 권태롭고 지겹게 느껴진다. 추측건대 겨울 방학부터 내리 아무 곳도 가지 않은 채 단조롭고 우중충한 블루밍턴에서 칩거하기 시작해서, 학기가 시작하고 보니 집-학교만 반복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토록 단조롭고 우울하고 외로운 겨울 날씨를 동력 삼아 꽤 많은 일을 했고, 생산성으로 잘 승화했다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일찍 심리적으로 방전이 되었다.



    온종일 회색으로 시작해 회색으로 끝나는 이 겨울이 권태롭다. 가장 바쁜 학기 초 시즌인데 다가올 봄방학과 여름방학에 어딜 갈까 이 궁리만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아쉬운 대로 유튜브로 배경음악이라도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음악을 틀어놓고 위로를 삼아본다.




   근래는 비도 많이 오고 수분 미스트처럼 미세한 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많았다. 아래 사진은 퇴근하고 집 가려는 길, 주차장에 안개가 자욱해서 미드 범죄 현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시야가 뿌옇고 좁아져서 운전하기도 꽤나 무서웠다. 시야가 너무 안 보이는 느낌이라 양쪽 창문을 다 내리고 기다시피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이렇게 기분도 날씨도 구리구리 할 때에 위로가 되는 것은 결국 사람들 밖에 없는 것 같다. 인복이라도 많은 게 어딘가 생각해 보면 또 감사한 마음이 그득하다. 늘 곁에서 영감과 위로, 배울 점을 주는 사람들을 기록해 보았다.

   맨날 같이 일하는 동기다. 무슨 다리만 1.5m는 될 것 같다. 자유분방하고 웃겨 죽는 친구다. 같이 불평불만도 하고, 힘든 일 있으면 하소연도 하고 시답잖은 농담과 발칙한 소리도 하며 소소한 재미를 찾는다. 이 친구는 mbti EEEE라서, 리더십 활동만 해도 벌써 한 손으로 부족할 정도다. 숨겨둔 복제인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게 나의 가설이다. 그럼에도 쉴 때 누워서라도 책을 안 놓는다. 연구 아이디어도 많아서 한 주에도 여러 교수님을 쫓아다니며 컨설팅을 받는다. 하여튼 옆에서 보면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응답하라 1988마냥 이 집에서 맛난 것 하면 와서 먹고, 저 집에서 또 하면 가서 먹고 있는 정겨운 이웃집 나리다. 사실, 바쁘고 권태로움 속에서 좋은 음식 잘 챙겨 먹는 것의 가치를 한동안 놓고 잊고 지냈는데, 나리 밥을 먹고 집밥 세포가 살아남을 느꼈다. 고소운 잡채에 매콤한 순두부찌개, 새콤달콤 무생채까지......! 그동안 왜 저렴한 패스트푸드에 미각과 위를 내주고 지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상에서도 스스로를 알차게 잘 챙겨 먹이는 정성과 생명력을 늘 배운다. 이날이 작은 터닝 포인트가 되어, 다시금 집밥에 열의를 갖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동기 생일이라 파트너들까지 총출동해서 생일파티를 했다. 동기가 아지트처럼 쓰는 한 친구의 집이다. 이 친구는 호스팅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생일 데코레이션에 애피타이저 Charcuterie 플래터까지 저렇게 예쁘게 차려놓고 우리를 맞이했다. 저 플래터가 별거 없어 보이지만, 진-짜 맛있었다.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호스팅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대, 이 친구는 아예 집을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서 파트너와 단둘이 사는 공간인데도 소파와 식탁 등을 이렇게 큼지막하게 구비해 놓았다고 한다. 방도 아예 한 방을 통째로 손님 방으로 킹사이즈 침대까지 별도로 구비해서 호텔처럼 해두었다.

   슈퍼 호스트 친구 덕분에 아늑한 공간에서 장을 봐서 준비해 간 음식들로 세 종류의 피자를 구워내고, 딸기 블루베리 생크림 파르페를 케이크처럼 만들어 촛불까지 알차게 했다. 사진만 봐도 공간이 주는 안락함과 포근함이 전해진다. 참 이런 공간을 구상하고 운영해나가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학기 가장 힘든 날인 화요일 일과를 보내고 역시나 기댈 곳은 남편뿐이다. 힘들다고 들숨에 찡찡 날숨에 찡찡댔더니 퇴근하고 같이 수제버거 집에 가서 금융 치료를 했다. 맛있는 버거와 감자를 먹으니 기분이 대번에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루가 긴 만큼 밀린 수다를 떨면서 밥을 먹으니 스트레스가 한결 내려가는 기분이다.





  정해진 자리에서 일하다가, 너무 답답해서 2층 테라스 공부 자리로 뛰쳐나왔다. 이상하게 사방이 막혀진 공간에서 일을 하면 하다가 머리도 가슴도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이게 개인차인지, 다른 보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10대 때도 공부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기질이 산만해서 그런 것인지 희한하게 독서실처럼 적막하고 자극이 딱 제한된 막힌 자리에서 공부를 하면 머리가 더 산만해지고, 오히려 주변 자극(소리, 시각, 타인 등등)이 있으면 더 일에 몰두가 잘 된다.


  모쪼록 과제와 수업 준비도 마치고, 첫 번째 Predoctoral 실습 장소 지원도 무사히 잘 마쳤다. 마음속 1순위 실습 장소인지라 마음이 선덕선덕 하다. 상담 슈퍼바이저 교수님께 추천서도 무사히 잘 받았는데, 너무나 선뜻 좋은 마음으로 긍정적 내용의 추천서를 써주셔서 매우 감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 본다. 아마 다음 주까지는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아서 당분간은 잊고 지내도 될 듯하다. 권태롭고 마음이 붕붕 뜬 와중에 할 일은 어떻게든 한 나 자신 칭찬해 본다, 쓰담쓰담.





   이번 주 무슨 감기가 유행인지 티칭에 아이들이 결석을 많이 했다. 아프다고 이메일을 엄청 많이 받아서 평소의 한 60% 밖에 출석을 하지 않았다. 모두 이 길고 춥고 흐리고 권태로운 겨울을 힘겹게 보내고 있구나 싶어 애잔한 마음을 가져본다. 이번 주는 특히 강의 준비도 더 할 게 많았던지라 품도 많이 들었던 한 주였다.






  여전히 학기와 겨울은 갈 길이 한참 남았다. 학기 초부터 조금 지치고 권태로운 마음이 걱정이지만, 찬찬히 글을 쓰고 보니 주변에 있는 따뜻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온기와 활기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또, 다가올 봄 방학 계획도 틈틈이 짜며 머리를 환기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북미에서 길고 어두운 겨울을 보내는 이들에게 소소하고 잔잔한 위로를 보내며 이만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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