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며칠 뒤, 클리닉에서 다시 전화가 와서 피검사를 해보라고 권유를 받았다. 다시 예약을 잡고 피검사를 하고 결과를 받아보니 어려서 앓았던 질환이 재발을 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여, 멀티비타민과 각종 보충제를 3일간 중단하고 다시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고 왔다. 채혈해 주는 간호사 선생님이 금요일마다 피를 뽑으러 올 계획이냐고 하셨다. 지난주에 채혈한 자리에 멍이 채 가기도 전이라며.
저도 이게 계획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나저나 학기 한복판이고, 한창 케이스 로드도 늘려가고, 파이널 프로젝트들을 개시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 심적으로도 부담이 크다. 학교 클리닉에서 최종 결과까지 받아보고 대학병원으로 리퍼 해주면 일정을 잡아서 추가 검사들도 하고, 진료도 보고 해아 하는데 까마득한 것은 사실이다. 어찌저찌 일정들을 빼가면서 잡아보긴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피로나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싶다. 타지에서 아프니 괜스레 서럽고, 위축되고, 사기가 떨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프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심리상담센터 출근 날이다. 매일 싸가는 도시락 가방에 들어가는 친구들을 소개해 본다. 매일 구성이 조금씩 바뀌지만 큰 틀은 비슷하다. 점심에 먹을 샐러드 한 팩이 메인이고, 디저트로 스콘이나 머핀이 서브가 된다. 점심은 가볍게 먹지 않으면 1시부터 상담할 때 매우 졸려와서, 신경 써서 적당껏 먹는다. 대신 배고플 수 있으니 베이커리 디저트와 스낵들로 상담 사이사이 시간에 계속 에너지를 보충해 준다.
요즘 나리에게 건강한 식습관 지도 편달을 받고 있어서, 예전보다 초콜릿과 과자를 덜먹으려 노력 중이다. 하여 지난주부터 바나나, 사과, 견과류, 견과류 바 등으로 대체하고 과자는 작은 한 봉지만 넣었다. 센터에 보통 8시부터 6시 정도까지 있다 보니, 먹을 것을 이렇게 바리바리 싸가야 한다. 아침에 가져가는 도시락 가방은 제법 묵직-하고, 돌아오는 가방은 가볍다. 강제로 부지런을 떨다 보면 스스로 잘 먹이는 것에 뿌듯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서울처럼 사 먹을 곳이 도처에 널려있던 삶이 조금은 그립다.
이제는 출근하러 나가면 밤인지 아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바리바리 도시락 가방을 싸가지고 출근하는 길, 하늘의 달과 별이 너무나 선명하니 아름다워서 한 컷 남겨보았다. 출근할 때마다 하늘을 보는 것이 어찌 습관이 되었나 모르겠다. 거의 모든 포스팅에 출근길 사진 한 장이 고정 코너가 된 듯하다. 두 번째 사진은 센터에 갓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찍은 사진이다. 동이 트고 있는 하늘의 색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오피스에 창문이 없어서 하늘을 보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상담실 오피스에 소중한 액자를 가져다 놓았다. 7년 전, 한국에서 생애 첫 내담자와 심리 상담을 마치고 내담자에게 받았던 그림이다. 늘 초심을 잃지 말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자는 마음으로 가져다 두었다. 그때는 처음이라 한-참 부족했을 텐데도 그저 스펀지처럼 잘 흡수해준 내담자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떠듬떠듬 부족한 나라는 상담자를 같이 견뎌주는 내담자들이 있다. 액자를 볼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잘 보이는 탁자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어느덧 심리상담 시작한 지 7년 차다. 시간이 참 빠르다.
정기적으로 심리상담센터에서 랜덤으로 내담자를 무선 추출하여, 익명으로 센터와 상담자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다고 한다. 출근해 보니 사내 메신저로 센터장님께 개인 메시지가 와 있어서 간담이 서늘했다. 미국은 근로 평가가 정말 살벌하구나 생각했다. 사실 나야 수련생 신분이라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아도 "뿌- 배우고 있어요 아무것도 몰라요"를 시전할 수 있지만 정규직 스태프들은 꽤나 긴장이 될 것 같다.
액자를 가져다 놓으며 마음을 다잡은 것이 통한걸까? 다행히 누군지 모를 내담자가 좋은 평가를 구구절절 남겨주어 센터장님께 사내 메신저로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받았다. 감격이었다. 그리고 센터장님이 오피스에 와서 잘했다고 사워 젤리 한 알(?)을 주고 가셨다. 귀여워서 빵 터졌다. 그것도 봉지째로 준 것도 아니고 봉지 뜯어서 한 알만 딱 나눠주고 가셨다. 몇 알 더 줘요, 다른 맛도 줘요.....
모쪼록 근래 몸도 안 좋고 여러모로 악재와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열심히 마음 쓴 부분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아서 보람되고 행복했다.
삶이 너무 힘들어도 이런 순간들도 있다.
그렇다, 할러윈이었다.
위의 사진은 수업에 한 친구가 할로윈 코스튬을 입고 와서 수업을 뒤집어 놓으셨다. 그 수업 교수님이 이런 재미난 이벤트를 좋아하시는 분이셔서, 수업 시작 전같이 웃고 즐겼다. 아래 사진은 우리 과 교수님이다. 아, 정말 유리 너머로 보고 식겁할 뻔했다. 실제로 보면 덩치가 팔 척 장신인 교수님이라 더 놀랬다. 학생이고 교수고 할 것 없이 코스튬 입고 난리도 아니었다.
교....교수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우리 학교가 가장 아름답다는 가을이다. 캠퍼스 어디를 걸어도 정말 아름답다. 휴대폰 사진첩에 단풍 사진이 빼곡하다. 점심시간 산책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가을이다.
금주의 오피스와 리서치 라이팅 그룹이다. 이번 주는 여러모로 싱숭생숭하고 힘들어서 공부와 논문을 진척을 거의 못 시켰다. 그렇지만 힘든 때일수록 마음 편하게 가지고, 스스로 잘 다독여주어야 한다. 어쨌든 재발한 것도 그만큼 누적된 피로나 스트레스가 한몫했을 테니까 말이다. 한동안은 느슨하게 욕심을 많이 내려놓고 절전 모드로 최소한의 요구사항들만 하면서 가려고 한다.
지난주 삶과 마음에 일어난 일들을 와다다 적어 내려간 글이 브런치 인기글에 선정되었다. 소소하게 기뻤던 소식을 전하며, 이번 주 심란하고도 다사다난했던 한 주를 마무리해 본다. 오늘의 교훈: 건강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