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내내 선거 결과로 떠들썩했다. 아무래도 학과 지향점이 Multiculturalism & Social Justice 오리엔테이션인지라 집단적인 좌절감과 실망, 분노, 우울감이 팽배했다. 학교와 심리 상담 센터 모두 가는 곳마다 서로의 상태를 체크했다. 수업 데드라인들을 미뤄준다는 공지도 받았다. 교수님들과 슈퍼바이저 선생님들로부터 위로의 단체 메일도 여러 통 왔다. 미국 내에서 외국인 학생 + 소수 인종의 정체성으로 분류되다 보니, 개인적으로도 괜찮은지 물어오는 문자도 많이 받았다.
학내 흑인 학생들에게 목화 농장으로 복귀하라는 문자가 돌았다고 한다. 정신이 아찔하다. 미국 전통적 공화당 주인 인디애나의 시골 타운에서, 앞으로 아시안 여자 유학생으로 살아갈 날들이 까마득하다. 특히 저 문자를 보고 나니 덩달아 불안해졌다. 다행히 지도 교수님도 아시안으로서 미국에 뿌리를 옮겨 내린 사람으로서, 개인 면담에서 안심을 많이 시켜주셨다. 지도 교수님이 발 빠르게 개인 면담을 잡고 멘탈 관리(?)를 해 준 덕에 파국화하지 않고 어느 정도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교수님이 나이가 많아 베테랑 어드바이저라 감사하다. 물론, 미래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트럼프 시대에 공화당 주에서 공부하는 아시안 유학생의 삶, 어떤데...?
그러나 저러나 새로운 해는 새로 뜨고, 삶은 계속된다. 서머타임이 끝난 덕분에 지난 주만 해도 별 보며 달 보며 깜깜하던 출근길이 다시 훤-해졌다. 그리고 아침에 한 시간 더 잘 수 있어서 확실히 수월한 한 주였다. 8시 출근하는 날 특히 더 실감했다. 서머타임 종료 덕분에 한결 살만한 아침을 경험했다. 찬란하고 푸르른 여름이 가는 것은 너무 아쉽다. 블루밍턴은 겨울에 글루밍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흐리고, 우중충하다.
날이 차가워지니 어느 오피스에서 일하든 서늘하고 선덕 하니 감기 걸리기 딱 좋을 것 같다. 때마침 옆 오피스에 랩 선배가 쓰는 자그마한 히팅 패드가 눈에 들어와 따라서 하나 샀다. 오피스형 소형 전기장판이라고 보면 된다. 이것만 켜두면 세상 아늑-하고 포근-하니 행복지수와 근로 의욕 향상에 도움이 된다. 낮잠을 자고 싶어지는 것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심리 상담할 때만 빼고 오피스에서도 줄곧 덮고 있고, 위의 오른쪽 사진처럼 그룹 슈퍼비전 할 때에도 챙겨가서 켜놓고 덮었다. 슈퍼바이저 선생님들이 셀프케어를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그렇게 해주셨다. 한국이었으면 튀는 행동이라고는 자제하느라 못 가지고 다녔을 텐데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여전히 신기하고 생경하다. 그 특수를 이렇듯 알차게 활용 중이다.
이제는 심리 상담 센터에 제법 적응하고, 센터 내 선임 스텝들과도 편안해졌다. 세상 다른 문화를 가진 동양인 실습생인지라, 처음엔 나도 그렇지만 스텝들도 피차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었다. 서로를 낯가려 하다가 요즘은 부쩍 많이 편해졌다. 나는 미국인 스텝들의 쉬지 않는 small talk가 익숙해졌고, 반대로 스텝들은 나의 샤이함과 여백에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초반에 여러모로 삐걱댔던 슈퍼바이저 선생님과도 서로 조율이 많이 된 상태다. 슈퍼바이저 선생님도 이 기관에서 맞이하는 슈퍼바이지는 내가 처음이었고, 나는 이 기관 근무 자체가 처음인데다 외국인 학생인지라 상호 엇박자로 뚝딱 거리는 시간이 있었다. 하여, 매번 슈퍼비전 시간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컴플레인을 걸어야 했던 게 참으로 불편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하다가 결국 슈퍼바이저 선생님과 정들어버렸다. 잘 안 맞아도 줄곧 견뎌서 처음과 다른 결과를 경험한 것이 의미롭게 다가온다.
그래도 이리저리 뻗대는 외국인 수련생 관대하게 잘 받아주고, 또 최근에 여러모로 고전할 때마다 세심하게 조율해 주어 감사하고 감동받은 부분도 있었다. 다음 학기에는 슈퍼바이저 선생님을 바꿔야 하는데 이 관계에 노력과 투자를 많이 한지라 남 주기(?) 아깝다. 미운 정 은근히 무시 못 한다. 그래도 다음에 매칭될 슈퍼바이지는 한결 더 이 선생님과 일하기 수월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금주의 도시락 가방이다. 소고기와 채소를 굴 소스에 볶고 밥에 덮어 메인 요리로 싸갔다. 8시 출근할 때는 아침을 6시에 먹다 보니 점심 전에 너무 배가 고파서, 중간에 먹을 2차 아침으로 뺑오쇼콜라를 데워갔다. 함께 싸간 라테와 함께 마시면 당과 카페인 조합으로 에너지가 확 오른다. 그리고 점심으로 덮밥을 먹고, 오후 근무하면서 심리 상담 사이사이 에너지바, 사과, 레이스칩, 오레오, 견과 등을 야금야금 먹어준다. 아침부터 바리바리 열심히 계획해서 싸간다.
음식 앞에서만큼은 J가 되는 순도 99% P다.
이번에는 학과 오피스다. 지난 주의 부진을 떨치고 다시 학업과 업무의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삶이 가끔 여의치 않을 때는 욕심을 잠시 덜어두어도 좋은 듯하다. 조금 내려놓고 푹 쉬고 나니 다시금 돌아올 힘과 정신이 생겼다. 모쪼록 이번 주에는 오피스에서 수업 준비도 하고, 가르치는 수업 페이퍼 채점도 하고, 피드백도 구구절절 달아주고, 내 과제도 하고 열심히 따라잡았다.
틈틈이 랩 잡일(?)도 했다. 이번에 랩에서 랩 단체 티셔츠를 만들기로 해서 열심히 주문 제작을 알아보고 주문까지 마쳤다. Research Coordinator라고 쓰고, 랩 잡일 전담이라고 부른다, 촤하하. 그래도 한국에서 랩 일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선녀다. 모쪼록 적당한 가격대의 맞춤 제작 티셔츠를 찾아서 교수님 것 한 장을 먼저 시범 주문했다. 맞춤 제작이다 보니 어떻게 결과물이 나올지 몰라서 랩원들 것을 다 주문하기 전에 교수님 티셔츠만 하나 먼저 주문하기로 했다. 교수님이 자기가 Guinea Pig가 되겠다고 하셔서 굳이 고사하거나 말리지는 않았다.
랩 티셔츠를 할 때도 신기한 게, 한국처럼 다 통일하지 않고 티셔츠 색깔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다. 다 다른 색이면 뭐 어떠냐며 로고만 같이 박혀있으면 되지 않겠냐고. 교수님은 초록색을 고르셨고 랩원들은 각자 기호에 따라 흰색, 네이비, 회색 등등 다양하게 골랐다. 미국은 참 단체 티셔츠마저도 제각각이고 신기하다.
친구들과 금주의 Research Writing Group도 잘 마쳤다. 이 그룹을 조직하고 모집한 덕분에 학기 중에 논문 작업을 손 놓지 않고 느리게나마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한 문단이라도 꾸준히 계속 쓰는 게 중요한 것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Writing Group을 하고 있으면, 교수님들이 하나 둘 퇴근하시고 학과 사무실 불도 다 꺼져서 우리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가는 김에 한 컷 남겨보았다. 마음은 뿌듯하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매 주의 소소한 노력들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어볼 뿐이다.
시차를 맞추어 오랜만에 오솔들과 한바탕 줌 미팅 수다를 떨었다. 이거 만나려고 주말 아침 7시에 일어났다는 것 아니겠는가? 주말에는 10시 이전에 기상하는 것은 불법이거늘.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니 안건이 너무나 많았다. 정신없이 4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고 남은 이야기는 카톡으로 마저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 40분 정도 이야기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르다. 이렇게라도 보고 얼굴로 한참 수다를 떨어서 향수가 많이 해소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삶은 힘듦과 그것을 버티고 나서 경험하는 보상의 연속된 굴레로 돌아가는 듯하다. 한국 시스템에서 나고 자라면서 배운 것은 '존버'하는 것 하나인데, 이 곳에서도 유용하게 쓰고 있다. 약간의 미국식 변주를 허용하면서 말이다. 매번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는 나날들이 버겁고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집약적인 성장을 하는 유학생활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