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겨우 붙어 살아가는 박사 유학생의 학기 중 나날
날씨가 딱 좋다.
놓치기 퍽 아쉬운 날씨다. 길고도 지난한 한 주를 보내고 맞이한 주말이다. 토요일은 온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체력과 피로 회복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일요일, 기운이 조금 올라오자 비로소 이 아까운 날씨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 다운타운에 브런치를 먹으러 나왔다.
날씨가 좋으니 길가를 따라 테라스와 파라솔이 주욱 즐비해있다. 주말의 브런치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복작복작하니 보기 좋다. 아직은 볕 아래 있으면 꽤 더우나, 그늘에만 들어가도 한결 서늘해서 야외 자리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도 음식점에 야외 테라스 좌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날이 조금만 추워지면 이 테라스 자리는 곧 철거가 되기 때문에 그전에 꼭 즐겨보고 싶었다. 서늘한 그늘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앉아 있으니 꼭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설렜다. 오래간만에 나와서 코에 바람도 넣고 남이 해주는 밥도 먹고 하니 기분이 좋다.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 좋은 나들이였다.
추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더 나다녀야겠다.
지름신이 강림하였다. 학업 스트레스에 젤리만 한 것이 없다. 이 젤리는 영국산 마시멜로 젤린데, 식감이 아주 찰져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젤리다. 찰지게 쫀득쫀득해서 스트레스가 확확 풀린다. 학교 가지고 다니면서 아주 요긴하게 먹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니 왜 이렇게까지 많이 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구매 시점에서는 많이 사고픈 충동이 가득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학기 중에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발현되곤 한다.
한국 친구들과 스터디도 어찌저찌 잘 이어가고 있다. 시차라는 장벽을 넘어 줌으로 나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성격 병리에 대한 대상관계적 접근을 공부하고 있는데 도움이 꽤 된다. 심리 상담은 하면 할수록 공부해야 할 것들만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쌓아가다 보면 어느샌가는 쌓여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한 주씩 차근차근 내디뎌 본다.
이번 학기 수업들 중 제일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슈퍼비전 수업이다. 드디어 슈퍼비전을 배운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심리 상담 실습을 처음 하는 석사생들 및 박사 1년 차 학생들 5명을 맡아서 이번 학기 슈퍼비전을 해야 한다. 맨날 받아보기만 했지 해보는 건 처음이라 떨린다. 그래도 바로 슈퍼바이저 롤에 뛰어드는 것보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배우고 해볼 수 있는 게 어딘가 싶다. 그리고 다양하게 여러 슈퍼바이저를 거쳐본 만큼 데이터도 많이 쌓여서 어떤 슈퍼바이저가 되고 싶은지 꽤 명확한 편이다. 다만, 5명이랑 다 따로 개인 미팅을 잡으려니 일정이 타이트해져서 조금 걱정이다.
이번 학기도 어지간히 바쁘겠구나......!
이번엔 심리 상담 센터 근무다. 이제 본격적으로 케이스 로드가 꽉꽉 차기 시작해서 숨 가쁘게 흘러간다. 8시에 출근하면 5시나 6시에 퇴근할 때까지 시간대별 타임슬랏이 꽉꽉 차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센터 출근한 날은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초저녁부터 떡실신행이다. 체력적으로는 너무 힘들지만, 누적 실습시간과 경험치는 우상향으로 순항 중이라 뿌듯하기도 하다.
남은 학기 동안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굳건히 잘 버티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다.
심리 상담 센터는 바쁘고 정신없지만 늘 한 모금의 감성이 흐른다. 부센터장님이 정성으로 키우는 식물들이 번영하고 있다. 이 꽃은 실제로 보면 내 주먹보다도 훨씬 크다. 화분에서 키우는 꽃 중에서 이렇게 큰 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일만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워내는지 모르겠다.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꽃이라, 오고 가며 볼 때마다 감탄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공유 키친 화이트보드다. 금요일 일과 마친 후, 다가올 월요일을 대비해서 나도 하나 끄적여 보았다. 최근에 제일 인상 깊게 본 넷플릭스 '미지의 서울'에 나온 대사를 챗 지피티한테 번역해달라고 한 것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는 대사다. 어쩐지 월요일을 시작하는 마당에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하나 적어놓고 나왔다.
금요일에 심리 상담 센터 풀타임 근무를 마치고는 바로 이어 연구 미팅이 있었다, 휴! 너무나 유익한 미팅이었으나, 이날 센터에서 너무 바빴던 터라 퇴근하고 앉아서 듣는데 솔직히 말하면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존재만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고 한다. 날 잡아 잡숴, 나는 못혀.
다음 학기부터 심리치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해서 이번 학기에 파일럿 테스팅을 진행 중인데, 그 파일럿 테스팅에 참여할 테라피스트들을 트레이닝하는 세션이었다. 지도 교수님이 APA에 초청받아서 DC의 한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심리치료 시연 영상을 보며 공부를 했다.
나는 배터리 다 되어 껍데기만 존재하는 불량 학생이었지만, 우리 교수님은 참 멋저부렀다.
체력이 달려서 그런가 확실히 이번 주 고기를 많이 해먹었다. 삼겹살에 김치찌개, 그리고 소고기에 된장찌개는 참진리다. 사실 고기 구워 먹기로 한 날은 일하면서 한 1시쯤부터 저녁 먹을 생각 밖에 안 한다. 그리고 또 그걸로 하루를 버텨낸다. '이것만 하면 집에 가서 소고기에 된장 먹는다' 속으로 계속 되뇌면 그게 힘이 된다. 부작용이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다는 것...? 소고기 구워 먹으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성공적으로 10분 일찍 퇴근했다. 얏호!
인생 너무 힘들지만, 맛있는 저녁 한 끼에 이토록 행복할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뭐 그러하다. 삶이 고단하니 저절로 단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힘도 없어진다.
이번 주도 투정 어린 포스팅이 되었다. 학기 중에는 맨날 쓰는 말이 힘들다 밖에 없는 것 같다. 늘 투덜거리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일개 대학원생의 포스팅을 늘 읽어주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금주의 회고록을 접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