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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gie Woogie Jan 27. 2021

연기자들이 알려준 극 예술의 매력

그리고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병장 때, 그러니까 군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갑자기 인복이 넘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면, 이병, 일병, 상병을 같이 거쳐나가며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은 서운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내 군 생활은 항상 인복이 넘쳤던 것으로 마무리 짓고... 여하튼 뮤지컬을 전공으로 하던 친구가 생활관에 후임으로 들어오더니, 그 친구의 맞후임으로는 연극을 하던 친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문과인 나는 전차 조종수고, 뮤지컬 배우는 지뢰병에, 연극 배우는 야전공병... 뭐 이런 조합으로 전쟁을 하려 하나 싶긴 했지만, 내 관심사는 애초부터 그런 데에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내 관심사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있었다. 마침 이 기회에 연기와도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예술의 매력

워낙 연기라는 예술과는 접점이 없던 터라, 그쪽 분야에 일자무식이었던 나와 선뜻 대화해 준 그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양해를 구하면서 묻긴 했지만, 내 질문들이 워낙 터무니없었던 터라 무례하게 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좋은 연기는 무엇이냐? 그건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냐? 너희는 학교에서 어떤 것들을 배우냐? 등... 역지사지해서 누군가가 나의 전공에 대해 그런 질문을 했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하지만 이런 짓궂은 질문들에도 그 친구들은 항상 나의 우문에 대한 현답을 들려주었다.

연기자들이 말해주는 극 예술의 매력

갑자기 왜 군 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질질 끌까 생각이 들 것이다. 조금만 참고 읽어주길, 목적지에 다 와 간다. 언젠가는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사람들이 극 예술을 봐야 하는가, 그것도 영화를 제쳐두고 말이다. 그 친구들은 극 예술의 매력을 연기자와 관객의 입장에서 말해주었다.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연극의 매력이라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이 와 닿지 않았지만,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완전히 몰입한 순간과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하긴 주변에 누가 있던 인상 막 찌푸려가며, 스스로에 심취해서 제멋대로 기타 솔로를 연주할 때가 제일 재밌는 법이다.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 대본으로는 느끼기 힘든 감정들을 느끼며, 자아를 성찰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연극은 영화처럼 '컷'들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실적인 매체들보다 관객들이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말들에 나는 감명을 받았고, 전역을 하면 연극을 보러 다니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무작정 연극을 보러 갈 수는 없는 상황이니, 후일을 기약하면서 나는 여러 극들을 '읽는다'. 물론 극들을 읽는 것은 직접 극장에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작품들은 이렇게 접해도 감동을 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문과에서 그림 하나 없이 알파벳으로 빽빽하게 쓰인 베케트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보는 법'이 아니라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내가 열심히 몰던 전차(戰車)는 아니고, 전차(電車)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스텔라의 누나인 블랑쉬 드부아가 묘지를 거쳐 뉴올리언스의 엘리시안 필즈(Elysian Fields)에 도착하면서 극이 시작한다. 엘리시안 필즈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천국인데, 장소의 이름과 실체의 괴리는 상당히 크다. 비록 이제는 몰락했지만, 출신 자체는 프랑스계 귀족인 블랑쉬가 보기엔 이 동네는 허름한 슬럼가인 데다가, 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거칠기만 하다. 그녀의 동생, 스텔라는 폴란드계 노동자와 결혼했는데, 폭언은 물론이고 임신한 스텔라에게 폭력까지 서슴없이 휘두르자, 블랑쉬는 스탠리에 대한 불만을 동생에게 토로하기 시작한다. 스탠리는 이를 엿듣게 되는데, 부유한 귀족인지 알았던 처형, 블쉬가 빈털터리 신세가 된 것부터 애초부터 탐탁지 않았던 스탠리는 처형을 뒷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화려한 겉모습은 사실 허장성세였음이 밝혀진다. 블랑쉬는 동성애자였던 전 남편의 자살을 목격하고 정신이 나가서 마을의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엔 그 남성 편력 때문에 추방된 것이었다. 스탠리는 이 사실을 스텔라는 물론이고, 블랑쉬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자신의 친구 미치에게도 알리며, 블랑쉬를 완전히 몰락시킨다. 충격을 받은 블랑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게 되어 정신 병동에 갇히게 되는 것으로 극은 결말지어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에서 스탠리 코왈스키와 스텔라. 말론 브란도가 스탠리를 연기했다.

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명작이라 칭송받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흔한 삼류 드라마나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류 드라마의 매력이 무엇이던가. 모두가 욕하지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아닌가. 이 작품의 매력은 삼류 드라마의 포장지를 걷고 나서야 보이는 여러 겹의 심오함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몰락해버린 블랑쉬에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다름 아닌 연민이다. 대저택 벨 리브(Belle Reve, 프랑스어로 좋은 꿈)을 잃고 욕망이란 전차를 타고 묘지를 거쳐서, 천국에 도착한 블랑쉬... 그런 그녀는 자신의 죄는 '사실주의(Realism)'가 싫어서 '마술'을 원할 뿐이고, 안팎이 거짓말이라는 비판에는 '마음속으론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변명한다. 블랑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렇게 경쾌한 음악이 상징하는 바가 비극과 광기라고?

이를 보면,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는 굉장히 섬세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개연성 있게 탐구해서, 다소 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전개에도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블루스와 '바수비아나' 폴카와 같은 음악을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해내는 것 역시 굉장히 감각적인 설계라고 느껴졌다. 물론 작품을 연극 대신 대본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느낄 수 없었을 테니, 극 중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는 '바수비아나' 폴카를 아래에 첨부한다. 이렇게 경쾌한 음악이 상징하는 바는 다름 아닌 비극과 광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이 창작된 시기나 시간적 배경이 현대와 접점이 없어 보이더라도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글로 접했다고,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배우들의 연기와 배경음악이 느끼게 해 줬을 격렬한 감정을 경험할 기회는 놓쳤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많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찬찬히, 그리고 자세히 읽을수록, 더 많은 상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우위를 가진 독자들은 같은 작품을 '관객'들이 놓치기 쉬운 디테일들을 잡아내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이 등(燈)과 동일시되는 블랑쉬, 죽음과 욕망, 노동 계급과 몰락한 남부 귀족 간의 역학 관계 등의 장치들을 말이다.


아, 마지막으로 내가 어쩌다 영문과 입학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던가? 돌이켜보면 보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영문과 커리큘럼을 보는데, American and English Drama란 강의 명을 보고, 요즘 영문과는 영드와 미드도 수업 시간에 공부하는구나. 그거 참 재밌겠다 싶어서 그랬다. 그 드라마가 극을 이야기한 것일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 American and English Drama가 영드와 미드가 아니더라도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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