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gie Woogie Jan 26. 2021

힙스터 식물들을 위한 노래, 감히 인간이 듣겠습니다

 <Mother Earth's Plantasia>와 전자음악의 역사

요즘 식물이 대세이다. 지구는 수억 년 전부터 초록 행성인데 새삼스럽게 식물이 대세냐며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겠냐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세계적으로 실내용 화초들이 '힙'한 소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힙'한 자취방이나 카페를 꾸미려면 화분 하나 정도는 놓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난초나 분재는 안된다. 무조건 초록색 잎만 있는 식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화분도 될 수 있으면 미니멀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초록색 잎만 있고, 화분도 미니멀하고... 마틸다, 합격일세.

갑자기 식물은 왜 유행인가 싶겠지만, 사실 실내용 화초들이 인테리어 용품으로 인식되는 것 또한 레트로와 관련이 있다. 1950~60년대부터 미국 중산층들 사이에서 실내용 화초들이 인기를 끌었다. 아마 사람들이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에는 실내를 정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풍성하게 꾸미는 것이 인기였는데, 이러한 유행 속에서 지금 우리가 힙하다 생각하는 축 늘어지고, 온통 초록색인 데다가, 잎도 큰 식물들이 선택받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그런 식물들은 가정에서는 사라졌지만, 쇼핑몰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계속 애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 실내용 화초의 유행은 1970~80년대를 동경하는 레트로 감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1974년 뉴욕 타임즈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7위가 식물과의 소통에 관련된 책이다.

1970년대, 식물을 기르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 중 몇몇은 식물과 소통하는 것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1974년에는 뉴욕 타임즈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에서 식물과의 소통에 대한 실험을 주제로 한 책이 7위에 오르기도 했다. 자신의 식물에게 좋은 노래를 들려주면서 키우고 싶은 사람들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2년 후인 1976년에는 식물을 위한 음악 앨범인 <Mother Earth's Plantasia>가 발매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요즘은 개를 위한 TV 채널도 있는데, 식물을 위한 노래에는 색안경을 쓰고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Mother Earth's Plantasia> (1976)

시시한 농담이었고, <Mother Earth's Plantasia>와 같은 식물을 위한 노래에 대한 수요는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애초부터 판매용도로 제작된 앨범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나마 시장에 풀린 앨범들은 LA에 있는 Mother Earth라는 원예 용품점에서 실내용 화초를 사거나, Sears 가구점에서 시몬스 매트리스를 산 고객들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Mother Earth's Plantasia>는 잊히지 않고 2019년 3월에는 Sacred Bones라는 음반사가 LP로 재발매하는 일이 벌어졌다. 컬트적인 인기와 앨범을 재발매해달라는 성원 때문이다. 1976년에 식물과 매트리스를 산 사람들에게 사은품으로 사용된 앨범이 갑자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일까 궁금할 것이다.


식물을 위한 음악이라 했을 때, 무슨 음악을 상상했을지 모르겠다. 클래식? 재즈? 아니면 식물은 우리처럼 귀가 없으니까, 어쩌면 그들만 감지할 수 있는 초저음이나 초고음으로 만들어져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것이 아닐까? 의외로 <Mother Earth's Plantasia>는 전자음악이다. 이 앨범이 21세기에 들어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이 앨범이 전자음악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다.


전자음악의 시작과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

무그 박사와 그의 획기적 발명품,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

1960년대에 로버트 무그 박사는 자신의 성을 딴 Moog 사에서 모듈러 신디사이저를 개발한다. 현대 음악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건반이 달려 있어 뮤지션들이 비교적 쉽게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그 모듈러로 만든 음악들이 금방 쏟아져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악기의 천문학적인 가격도 가격이지만, 지금이야 EDM이니 앰비언트니 하는 전자음악들이 대중화되었지만, 전자음악은 전자악기가 탄생하고서야 만들어진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전자음악에 대한 개념도 채 제대로 잡히지 않았는데, 전자음악에 대한 수요는 당연히 없을 테니, 사람들이 무그 모듈러의 활용 가능성을 못 알아본 것이다.

1966년 , 바흐의 음악을 무그 신디사이저로 실험한 작품이다.

처음으로 무그 모듈러의 용처(用處)를 알아본 것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사운드를 원하는 실험적인 뮤지션들이었다. 전선을 여기저기 꽂아보고, 노브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신디사이저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지구 상에서 최초로 울려 퍼질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뮤지션들에게는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웬디 카를로스는 바흐의 음악을 무그 모듈러로 재해석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래, 최초의 순수한 전자음악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바흐였다. 흥미롭지 않은가.


모트 가슨의 <Mother Earth's Plantasia>

무그 모듈러 신디사이저 앞에 서 있는 모트 가슨

다시 식물을 위한 앨범으로 돌아와서, 모트 가슨은 무그 모듈러를 이용한 선구적인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Mother Earth's Plantasia>는 그 결과물 중 하나이고 말이다. 앨범의 모든 사운드는 무그 모듈러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한 앨범의 역사성 때문에, 전자음악 리스너들이 이 앨범이 사람이 아니라 식물을 청자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열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실험적인 시도라 한들, 귀에 거슬리면 아무 의미가 없는 법이다.  

테레민은 1920년에 개발된 특이한 전자악기이다.

"Plantasia"는 앨범의 첫 곡으로, 찰랑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테레민(테레민은 허공에 손을 놀려, 주파수 간섭을 유도해 현악기와 유사한 소리를 내는 전자 악기이다. 영상을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의 휘파람 같은 소리는 신비롭다. 테레민의 소박한 소리가 끝나면 웅장한 브라스 사운드가 치고 들어오는데, 교향악에서 모티브를 얻은 구성임이 틀림없다. "Baby's tears blues" 역시 교향악처럼 당시의 리스너들이 친숙했을 장르의 음악을 재해석한 곡이다. 이름 그대로 블루스 곡인데, 기타와 피아노 사운드를 신디사이저로 설득력 있게 흉내 냈다. 기타 특유의 비브라토와 벤딩 주법까지 말이다. "Swingin' Spathiphyllums"는 빠른 템포의 보사 노바 곡을, "You Don't Have to Walk a Begonia"는 익살맞은 샹송을, "A Mellow Mood for Maidenhair"는 느린 템포의 락 음악을 연상시킨다. 이런 곡들이 모트 가슨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실험적인 음악들은 익숙하지 않고 불편한 느낌을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주는 것이 보통인데, 리스너들에게 익숙한 구성을 통해, 그런 불쾌함을 방지한다.

모트 가슨의 무그 모듈러, 'Photo-Synthesizer'. (광합성하다라는 'Photosynthesize'와 Synthesizer를 합친 말장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트 가슨을 한쪽 발은 기존의 음악에 담근 채로, 다른 쪽 발만 전위성에 담근 회색자로 오독해서는 안 된다. 위의 다섯 곡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곡은 모두에게 친숙하지 않은 사운드일 것이다. "Symphony for a Spider Plant"와 "Concerto for Philodendron & Ponthos"는 심포니와 콘체르토라는 익숙한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렇듯, <Mother Nature's Plantasia>에서 유일한 아쉬운 점은 전위성과 익숙함이라는 두 가지의 극단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이 작품이 인간이 아닌 식물을 위한 음악이라는 것일 뿐이다.

<Mother Earth's Plantasia>의 부제는 이러하다. 식물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지구의 음악... 앨범 아트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식물을 기르는 이유는 식물의 부동성이 주는 안정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분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식물을 바라보고 모트 가슨의 음악을 듣다 보면, 내 식물과 내가 마치 교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앨범이 참 좋았는데, 너도 좋았니, 고사리야? 또 듣고 싶다고? 그래, 알겠어.

매거진의 이전글 '락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전자음악, 역사를 만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