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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CAT Sep 28. 2018

영화 읽기 : 크로닉

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6년


크로닉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데이비드그의 데드-타임(Dead-time)에 관하여


영화 <크로닉>은 죽어가는 자들을 다룬 이야기다. 모든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한 살배기 아이에서부터 100살이 넘은 노인도 마찬가지다. 모두 같은 속도로 같은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아이에게도, 노인에게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젠가 마주해야할 공포이자 준비해야할 여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이란 것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TV드라마에서처럼 가족들을 모아 놓고, 흔들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눈을 감는 이들은 많지 않다. 늙거나,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통해서 추악해진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차가운 병실 침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의 진짜 모습이다. 자, 여기 이 죽음에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 죽음의 시간(Dead-time) 속의 데이비드가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에서는 다소 지루하고 느린 호흡의, 카메라가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묵묵히 인물들이 배경안에 ‘존재’ 하는 것을 담아내는 방식을 찾아냈고, 그것이 영화 안에서 커트와 커트 사이에 리얼타임을 스크린타임으로 만들기 위해 버려져 왔던 일상적이고 뻔한 동선과 움직임을 영화적인 순간으로 재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데드-타임(Dead-time)’, 직역하면 죽은 시간에 관한 영화적 표현방법이다. 


<크로닉>은 이 데드-타임의 표현방식을 이용하여 데이비드가 살아내고 있는 데드-타임, 즉 죽음의 시간들을 표현해 내고 있다. 영화의 첫 쇼트는 차 안에 있는 누군가가 차 밖의 배경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쇼트이다. 길고 지루하게 이 쇼트는 집안에서 나오는 나디아를 길게 바라보는 차량 조수석에서 말그대로 바라본다. 누군가의 시점쇼트처럼 길게 진행되는 이 쇼트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움직여 운전석에 앉아있는 데이비드로 향한다. 언뜻 보면 시점쇼트로 진행되던 쇼트가 데이비드의 프로필 쇼트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데이비드가 가지고 있는 만성질환(Chronic), 즉 마음의 병의 원인이 되는 죽은 아들의 시점쇼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마치 ‘병’과 같은 데이비드의 심리적인 상태를 하나의 시점쇼트로 설명해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이 이 쇼트를 ‘데드-타임’을 이용하여 길게 찍은 목적이다. 관객들이 지루해 할 정도로 누군가의 ‘시점 쇼트’라는 인상을 강하게 줌으로써 이 쇼트가 ‘시점 쇼트’임을 관객들이 인식하게 만들고 그 이후에 카메라를 움직인다. 이 쇼트의 목적은 나디아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데이비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데이비드 옆에 알수 없는 누군가의 시점쇼트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지는 쇼트는 나디아의 페이스북을 보고 있는 데이비드로 향한다. 딸의 페이스북을 보고 있는 아버지 데이비드. 아들의 시점 쇼트에 이어 나디아를 보는 데이비드로 향하는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처한 상황과 심리적 상태가 확연하게 그 아들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와 여러 환자들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데이비드 스스로 존엄사시킨 자신의 아들로 인한 마음의 병에 관한 영화이다. 다음 쇼트는 무서울정도로 깡마른 새라의 알몸을 씻기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쇼트는 데이비드의 헌신을 보여주는 쇼트가 아니다. 데이비드가 새라를 씻기는 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둔채로 주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순간순간 새라를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관객들에게 강제로 ‘치환’을 강요한다. 새라의 적나라한 알몸을 관객들이 편안하게 주시하기 위해서는 새라를 죽음을 앞둔 환자이자 일종의 반송장 상태로 인식해야 한다. 어느덧 새라의 가슴을 씻기는 데이비드의 손길이 새라의 성기로 향할 때 그것을 관객들이 불편하게 보던 시선을 거두게 되는 것. 그것이 이 쇼트의 목적이다. 


이 영화가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이 시선의 변화는 굉장히 무섭다. 쇼트의 시작에서 살아있던 한 명의 인간이 쇼트가 끝날 지점에서 죽음을 앞둔 반 시체로 변화되고 격하되는 지점. <크로닉>은 이 데드-타임이라는 표현방식을 통해서 죽음의 시간을 영화 안에 그대로 재현한다. 놀라운 순간이다. 이어지는 쇼트는 새라를 찾아온 새라의 친척들과 그들을 보내고 새라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이다. 데이비드가 호스피스 간호사라는 정보를 미리 알지 않고서야 이 쇼트를 보는 모든 이들은 이 둘을 분명 부부로 볼 것이다. 데이비드는 아내의 죽음을 목전에 둔 비운의 남편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음 쇼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쇼트이자 갑자기 거리를 좁히는 쇼트간의 연결방식 때문에 무섭게마저 보이는 데이비드가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쇼트가 나온다. 이 쇼트를 바라볼 때 우리는 기묘하게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은 이 전의 쇼트들이 죽음의 이미지에 가까운 절제된 운동성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면 데이비드의 이 쇼트는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최후의 몸부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이 삶의 몸부림이 있고 나서, 거짓말처럼 새라는 죽음을 맞는다. 다음 쇼트에서 새라의 시체를 깨끗하게 닦는 데이비드를 보며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죽음을 다룬 장면에서 여자가 죽어가는 장면은 없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영화 안에서 죽어가는 새라를 목격했다. 완전히 타인에게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곳까지 내맡기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달리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죽음을 앞두고 헐떡이는 새라를 은유한다. 이미 우리는 짧은 영화의 순간동안 한 인간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선 새라의 장례식을 방문한 데이비드가 이모의 죽음을 묻는 가족의 차에 타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새라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거부한 데이비드는 차에서 내려서 자신의 차로 향한다. 왜 데이비드는 새라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가? 그는 과연 자신의 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까지 관객들에게 데이비드는 아내를 잃은 비통한 새라의 남편을 연기한다. 이것이 연기임을 알게 되는 것은 조금 후의 일이겠지만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가족의 질문을 받고 자신이 진정으로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을 하지 못한다. 다음 쇼트에서 스스로 차에서 생각하는 지점은 추측해 보자면 아마 가족의 질문에 대한 복기이자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다. 새라의 남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녀에게 거리를 좁히고 그녀를 보호하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살아온 자아와 실제 그녀의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부딪히는 것이다. 이 자아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이어지는 쇼트에서 그 결론이 내려진다. 


다음 쇼트는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데이비드에게 한 커플이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데이비드가 새라의 죽음을 아내의 죽음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이 쇼트는 데이비드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바로 이전 쇼트들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쇼트다. 데이비드는 새라의 죽음 이후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고,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을 새라의 남편으로 정의한다. 데이비드가 환자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쇼트이자, 그의 심리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쇼트임과 동시에 데이비드가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쇼트다. 어떤 계기로 그 것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이비드는 아주 깊숙이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고 그 삶을 자기의 것으로 끌어온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죽음마저 아주 깊숙이 자신의 삶에 끌어다 놓는다. 이어지는 쇼트는 뇌졸중 환자인 존과 데이비드의 만남을 보여준다. 새라와의 쇼트처럼 긴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이 쇼트는 존이라는 인물과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가 등장하는 첫 쇼트에서 그는 유머러스하고 괄괄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뇨조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죽음으로 가까워 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마도 평생동안 그들을 끌고 왔었던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감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을 씻겨주는 장면에서 새라와 다르게 데이비드는 존에게 스스로 씻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이는 존이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존은 데이비드에게 결혼 했냐고 묻는다. 그리고 존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몇 쇼트 전에 새라와 결혼을 했고 새라를 떠나보냈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데이비드는 다시 존이라는 새로운 환자를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데이비드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데이비드의 가족은 과연 있을까? 아니면 정말로 없을까? 초반부 쇼트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디아라는 여성을 과연 누구일까? 이 의문들을 품고 계속 쇼트를 진행해보기로 한다. 새라가 거의 사물화된, 무기력해진 인간의 모습을 통해 죽음의 시간을 경험시킨다면, 존의 장면에서는 성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을 통해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처절한 죽음의 모습을 관조한다. 그 성욕의 모습은 아이패드로 적나라하게 포르노를 보는 일련의 장면들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또 다른 변화를 경험한다. 존과 데이비드가 함께 영화를 보는 쇼트 또한 이 영화의 죽음의 시간이다. 데드-타임의 표현방식은 점차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소비하고 생산하는 일련의 ‘살아있는’ 시간들이 영화를 보는 존과 데이비드를 긴 시간동안 지켜보며 그것이 점차 ‘죽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눈을 뜨고 점멸하는 영상을 지켜보는 상태. 그것이 <크로닉>에서 존을 통해 관객들이 간접경험하게 되는 죽음의 시간이다. 이후 데이비드는 존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존처럼 건축가인양 서점에서 책을 사고 존이 지은 집을 찍기 위해 남동생 행세를 한다. 그리고 아마도 포르노를 즐겨보는 존을 위해 여자간호사들을 물리고 스스로 그 옆을 지킨다. 데이비드의 이 행동은 어떤 부분에서는 환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결국 데이비드가 성추행범으로 의심받고 해고 되는 과정을 통해 이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시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데이비드는 존이 살아온 삶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그가 마주한 죽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존과의 거리를 좁히고 그를 조금씩 더 이해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얕은 것 뿐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존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다. 과연 우리 중 누군가가 존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어지는 쇼트는 다시 러닝머신 위를 뛰는 데이비드의 모습이다. 다시 이 쇼트를 접했을 때 우리는 이 데이비드라는 인물이 무언가를 굉장히 열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러닝머신 위를 뛰는 에너지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뛰는 곳은 러닝머신이고 결국 제자리뛰기에 불과하다.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러닝머신 위가 아니라 길 위에 서야 한다. 데이비드는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혹은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달려왔는가? 다음 쇼트에서 그 답이 드러난다. 데이비드를 길게 따라가는 롱테이크 쇼트 이후에 데이비드는 딸 나디아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나디아를 이미 영화의 초반 쇼트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마주했다. 그녀는 누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선택한 영화적인 표현방법은 왜 이렇게 길게 그녀를 찾아가는 길을 길게 보여줬던 것일까? 그것은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런닝머신 위를 뛰는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보였던 데이비드는 역시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데이비드는 결국 프레임 안을 헤매다 나디아를 만나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쇼트의 연결을 통해 나디아가 데이비드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데이비드가 나디아에게 찾아가기 위해선 첫 쇼트에서도 나타나듯이 굉장히 긴 물리적인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이것을 짧은 쇼트의 몽타주들로 표현했다면 데이비드의 내적 갈등은 가닥가닥 끊어져 있지 않을까. 영화는 물리적으로 관객들에게 데이비드의 고뇌의 순간을 경험시킨다. 데이비드는 나디아에게 안긴다. 항상 환자들을 안아주었던 ‘치료자’의 입장에서의 데이비드는 이 장면을 통해 ‘환자’이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로 역전된다. 그는 매순간 환자를 필요 이상으로 챙기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쇼트로 관객들에게 그가 가진 ‘만성질환’을 드러낸다. 


다음 쇼트는 바로 데이비드가 아내와 만나는 장면인데, 이 쇼트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바로 연결된다. 그것이 이미 전 쇼트에서 데이비드가 나디아로 향할 때 충분히 많은 시간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내의 경우 그에게 있어 별다른 고민이 필요 없는 인물로 보여진다. 이제 데이비드는 적은 돈이지만 가족 곁에서 마샤를 간호하는 일을 맡게 된다. 나디아에게 마샤에 대해 물어보던 데이비드의 쇼트에서 나디아는 데이비드에게 댄에 대해서 물어본다. 이 질문에 대해 데이비드는 굉장히 오랜시간 동안 침묵하며 대답을 고민한다. 한참을 침묵하던 데이비드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존엄사 시켰던 데이비드. 우리는 이쯤에서 어떤 것이 삶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마샤를 통해 이 고민의 지점을 담담하게 응시해 나간다. 마샤는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환자지만 새라나 존에 비해선 거동이 자유로운 편이다. 다만 공통점은 그녀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공간에서 그녀는 죽은 듯 누워 TV를 보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역시나 관객들은 이 광경을 길게 관조하면서 프레임 안의 인물들이 점차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데드-타임으로 공유한다. 하지만 다른 환자와 또 다르게 화학치료를 받고 돌아와 똥을 지린 그녀의 팬티를 벗기고 씻겨주는 데이비드를 보며 그녀는 다른 이들과 또 다르게 죽음 그 자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이미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에 있으며 그녀는 이렇게 생명을 연장하느니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제 다시, 달리는 데이빗이 나온다. 데이빗은 이 달리는 쇼트를 통해 그녀의 제안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은 데이빗의 물음에서 확장되어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육체의 죽음이 곧 죽음일 것인가? 아니면 내 영혼의 죽음, 즉 스스로 삶을 포기한 상태가 바로 ‘죽음’일 것인가? 그렇다면 환자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호스피스인 데이빗은 환자를 위해서 정말로 죽음을 대신 선택해주어야 하는것인가? 그 질문을 우리 누구도 함부로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를 따라가 보자. 데이빗은 다시 마사를 찾아가 말 없이 텔레비전을 본다. 이 장면을 데드-타임으로 만드는 것은 데이빗과 마사가 무엇을 보는지 관객들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정보는 데이빗과 마사가 무언가를 단순히 ‘보고 있다’, 혹은 ‘시선을 두고 있다’ 정도일 것이다. 이 침묵의 시간 속에서 데이빗과 마사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동상이몽이라고 해야 옳을까. 이 둘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사는 죽고싶을 것이고 데이빗은 마사의 그런 상태를 알고 그녀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 주는 것이 옳을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점점 쇠약해져가고 점점 죽어간다. 우리는 마사를 통해서 가장 긴 시간동안 그나마 멀쩡해 보였던 한명의 인간이 점차 나약해지고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 마침내 마사가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똥을 싸게 되고 그것을 씻겨주는 데이빗을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에서 우리는 마사를, 마사의 죽음의 감정을 이해한다. 사라를 씻기는 데이빗을 통해서 생명력이 없는 사라의 모습에서 죽음을 경험했듯이 우리는 마사의 모멸감과 이제 내 자신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죽음에 가까워짐에 따라 겪게되는 죽음의 감정들, 그리고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이 긴 데드-타임을 통해 경험한다. 데이빗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하는 그에게 마사는 도와달라고 말하고, 그런 마사를 데이빗은 외면한다. 


데이비드는 계속해서 고민한다. 과연 그렇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실 데이비드는 스스로에게 그 답을 갖고 있다. 그는 이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존엄사 시켰다. 그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그의 만성질환인 마음의 병은 그로 인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으로 환자의 죽음과 맞선다. 아마도 스스로 환자의 아내가 되고, 동생이 되어 그의 죽음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것들은 아들 떄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어쩔수 없었던 선택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그녀를 죽게 해줄 수밖에 없다. 그가 결국 마음을 먹고 마사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은 긴 데드-타임으로 촬영된다. 죽음을 관객들에게 경험시키는데 이어서 죽음을 선택하고 여자가 죽어가는 과정- 그 데드타임을 보여준다. 이후 마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리고 난 뒤 멍하기 있는 그를 보면 그가 두 번째 선택은 내렸지만 스스로의 결정이 또 다른 만성질환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들 하나만으로 충분히 괴로웠던 그의 마음의 병은 더욱 커졌다. 이제 데이비드는 장애인 소년을 돌보게 된다. 아들의 부재가 계속되었던 그의 옆에 장애인 소년이 위치한 순간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와 아들이 처했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소년을 만났을 때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두 번째의 존엄사, 즉 마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맞게 한 이후에 그의 마음의 병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아들을 연상시키는 소년을 만난 순간 그는 스스로 더 이상 자신의 병을 키울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암세포와 같은 죄책감으로 점철된 마음의 병을 지우고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아마도 그는 계속해서 그 병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병에 대한 치료약으로 스스로의 몸을 혹사하는 방식으로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 옆에서 경험한 것은 운동성의 상실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스스로 어딘가를 목적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것처럼 정면쇼트로 대부분 보여지는 데이비드의 달리기 쇼트에서 그는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고만 있다.’ 러닝머신은 제자리 뛰기다. 운동은 되지만 달리기 본연의 목적, 즉 목적지가 없다는 것은 다른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목적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계속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이자 굴레를 벗어나고자 달린다. 하지만 그 달리기는 제자리 뛰기고, 계속해서 데이비드는 프레임 안에 같혀있을 뿐이다. 마지막 쇼트, 데이비드는 러닝머신을 벗어나 밖을 달린다. 잠시나마 그가 밖을 달리는 지점에서 답답함을 벗어난 후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가 달리는 것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프레임 안에 ‘가둔다.’ 그가 선택한 죽음은 아마도 그가 지켜봤던 죽음들처럼 아주 ‘자연스러운’것일지 모른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존엄사. 자살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다른 환자들이 그에게 부탁했듯 스스로 원한 타살이다. 그는 매우 태연하게 차가 그를 치어 그가 강제로 프레임 밖으로 튕겨나가 죽음을 맞게 될 때까지 달린다. 


이 장면은 몇가지 장면으로 읽힐 수 있겠다. 하나는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란 것은 정말 찰나간에 ‘맞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만약에 그가 차가 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정말로 실수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이라면 사실 이 영화의 전개방식에서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두가지 실마리가 있는데, 하나는 달리는 장면에서 앞서 차가 나오는 쪽을 바라보고 나왔을 때 차가 골목으로 나온다는 복선과 더불어서 차에 치기에 앞서 차가 오는 방향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로는 그가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튕겨져 나간 이후에 보이는 신호등의 불빛이 보행자 신호가 아니였다는 지점이다. 이 마지막 쇼트를 길게 보여준 이유.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데이비드 스스로가 선택한 타살로서의 죽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들과 환자들에게 행했던 존엄사는 스스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이에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원하는 편안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거리를 달리는 데이비드의 상태와도 같다. 데이비드는 이미 장애인 소년을 만난 이후 스스로의 존엄이 더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죽음을 결심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앞서 스스로도 모르게 죽음을 맞았다는 해석도 일정부분에서는 들어맞는 해석이다. 그는 스스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편안한 상태로 죽음을 향해 뛰어간다. 그가 차를 보았을 때 죽음을 인지했다면 그것은 그가 원한 존엄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원했던 것은 그 죽음이 타인에게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져야 될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들도, 그리고 마사도, 그리고 확실치 않지만 만약의 사라의 죽음도 데이비드가 행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의 죽음 이후 뒤의 차량들과 그 속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크게 놀라지 않고 경적을 올리며 지나가버리는 것도 그 때문 일 것이다. 


때론 죽음이 인간을 선택한다.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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