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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CAT Feb 05. 2019

영화 읽기 : 헝거

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6년

헝거 - 우리는 어떤 믿음을 따라가는가?


영화의 시작, 실화의 강렬함


영화<헝거>의 첫 장면은 자막이다. 1981년의 북아일랜드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보여주는 자막에 이어, 1969년도 이후 IRA(아일랜드 독립군)와 영국간의 분쟁으로 인해 2187명이 사망했고, 그리고 수감된 IRA들이 정치범이 아닌 단순한 범죄자로 취급되며, 그들이 옷을 입지 않고 담요 한 장만 두른 채로 씻지 않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헝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는 첫 장면의 자막을 통해 이 영화가 다루는 세계에 대해서 먼저 알려준다. 영화는 앞서 영화 스스로 소개한 것처럼 IRA의 투쟁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이클 패스밴더가 분한 인물 바비 샌즈가 있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했던 IRA 단식투쟁의 리더였던 그를 영화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다룬 영화에서 과연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는 항상 실화를 다룬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혀 왔다. 영화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는 몇몇 부분에서 그 위치를 명확하게 해준다.


옷, 겉에 입는 것들에 대하여


타이틀 이후 영화는 곧 알게 되겠지만 교도관을 따라서 시작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아무도 이 장면에서 이 인물이 교도관인 것을 알 수가 없다. 관객들이 이 인물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두 개의 반지를 끼고 있으며, 깔끔하게 잘 다려진 옷을 순서대로 입는, 매우 정돈되고 규칙적인 사람이라는 점뿐이다. 아무도 이 인물의 일상에서 그가 교도관임을 알아 챌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옷’이다. 그는 평범하게 옷을 입었고, 집을 나서자 차 밑을 면밀히 살피고 심지어 떠나는 그를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여성은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IRA들이 정치범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해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 라디오를 통해 지나간다. 그리고 도착한 일터에서, 이상하게도 그를 포함한 동료들은 옷을 ‘갈아입는다.’ 총과 함께 반지를 제 방향으로 내려놓은 것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이들이 경찰(교도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들은 옷을 갈아입는가? 그들이 했던 불필요한 행동들은 굉장히 오랜 뒤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반절이 지나간 이후에야 나오는 교도관 테러 장면인데, 이 장면을 보고나서 그제야 관객들은 이들이 했던 불필요했던 행동들이 실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불안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영화 전체적으로 다루어지는 ‘옷’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리는 제한된 인물의 정보 안에서 그가 교도관이라는 사실을 ‘옷’으로 먼저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감독은 옷이야말로 인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설정해 놓은 것이다.


앞서 교도관의 ‘옷’에 집중하고 있는 관객들은 이후 중요한 장면을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신입 죄수가 들어와 죄수복을 입지 않겠다는 대사를 하고 발가벗는 장면이다. 이것은 IRA가 담요시위를 했던 의도와 연결되는데, 바로 옷이라는 것이 입는 사람의 속성, 지위, 그리고 권력관계까지 좌우한다는 시선이다. 실제로 우리는 옷을 입음으로써 서로를 파악하고, 옷의 종류, 가치를 따라 관계의 고하를 인지한다. IRA는 이러한 판단 하에 스스로 옷을 벗고 담요 한 장으로만 살아가는 시위를 하였고, 감독은 그들의 판단의 근거를 암시하기 위해 교도관으로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출근을 하는 초반부 시퀀스를 통해 표현하였다. 그들은 왜 옷을 벗고 시위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없애는 지점이다.


영화가 불안을 표현하는 방법 ① : 더치 앵글


초반부 시퀀스는 또한 교도관의 이상한 행동과 그리고 그 행동을 표현하는 쇼트들과 함께 한 가지 정서를 다룬다.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영화가 불안을 만드는 방법은 몇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먼저 타이틀 이후 첫 쇼트에서 사용되는 더치 앵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화장실에서 물을 틀고 반지를 내려놓는 교도관의 손을 보여주는 쇼트인데, 이 쇼트는 기존 우리가 보아왔던 쇼트들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많은 영화들을 통해 이러한 장면에서 흔히 쓰였던 앵글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익숙한 쇼트의 앵글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이 쇼트를 봄으로써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관객들의 안정감을 인위적으로 빼앗는다. 이 더치 앵글 쇼트는 출근 장면 이후에 나오는 (실제로는 바비를 강제로 씻기고 난 후) 교도관의 미러 쇼트에서 반복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더치 앵글과 더불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2.35:1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다.


영화가 불안을 표현하는 방법 ② : 2.35.1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


2.35:1 화면비율은 상용화된 영화 화면비율 중에서 가장 가로가 긴 화면 비율이다. 가로가 길다는 말은 바로 상대적으로 수직의 이미지보다는 수평의 이미지가 더 강조된다는 점인데, 수평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의 특성상 수평이 깨지는 ‘더치 앵글’의 효과는 더욱 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더치앵글 쇼트 다음에 감독은 교도관의 미러 쇼트를 배치한다. 이 미러 쇼트는 화면비율을 통해 획득한 횡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쇼트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인물을 화면의 구석으로 배치한다. 4:3이나 16:9 화면비에 비해 더욱 구석진 느낌이 나는 화면비율 때문에, 이 효과는 배가된다. 이 쇼트에서 거울을 보는 교도관은 자신의 뒷모습에 가려 구석으로 몰려있고, 이 답답함은 앞의 쇼트와 더불어 교도관의 ‘불안감’을 조금씩 쌓아가는 역할을 한다. 이 방법은 교도관이 옷을 입는 쇼트와 차를 타고 출근하는 쇼트에서도 반복된다. 보통 인물이 시선을 두는 쪽을 비워두는 것이 편안해 보이는 반면 이 쇼트에서는 인물의 시선 반대편을 비워두고 마치 프레임이라는 벽 앞에 몰린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인물의 불안감을 가중하고 좀 더 답답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가 불안을 표현하는 방법 ③ : De-framing


영화는 이 답답함을 이어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것은 바로 다음쇼트에서 등장한다. 바로 프레임 안에 인물을 온전히 담지 않는 것인데, 거울 쇼트 이후에 옷을 입는 쇼트부터 이를 사용하고 있다. 세로의 공간의 좁은 화면비율을 이용해 인물을 ‘잘라내’서 관객들이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영화가 불안을 표현하는 방법 ④ : Fix촬영과 클로즈업의 사용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쉽고 많은 영화에서 사용된 선택은 바로 핸드헬드 촬영으로 인해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으로 발생하는 불안감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오히려 쇼트의 내부를 세밀하게 살피게 하여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을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헐적으로 풀 쇼트 뒤에 튀어나오는 클로즈업 쇼트와의 충돌을 통해 긴장감을 만드는데, 그것이 우습게도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차에 시동을 거는 일상적인 쇼트들이라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쇼트들의 배합을 통해 일상에서도 불안에 떠는 교도관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초반부 왜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그의 출근길을 그렇게 불안과 공포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또한 이것들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쇼트의 반복을 통한 관객의 시점 변화

하지만 아직 우리는 이 인물이 어떠한 정서적 고민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지점은 눈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도관의 쇼트에서 이 교도관이 어떠한 일로 손에 상처를 입었고, 이 상처가 만들어진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점이다. 이 쇼트는 영화 중반에 한번 더 반복되는데, 이 반복을 통해서 관객들은 정반대의 위치에서 이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눈 내리는 쇼트와 다친 손을 씻는 미러 쇼트가 다분히 교도관이라는 인물을 따라가며 교도관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손의 상처가 바비를 강제로 씻기고 머리카락을 자르며 가해진 폭력의 반작용임을 관객이 알아챈 이후엔 이 장면은 다르게 읽히게 된다.


앞서 눈 쇼트에서 등장한 쥐에게 담배를 던지는 장면도 앞서 보았을 때는 스스로를 투영한 것이라고 읽힌다면, 폭력의 장면들을 보고 난 이후에는 마치 IRA 죄수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에 대한 환멸이 쥐에게 담배를 던지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반복되는 쇼트 이후에 변화하는 거리감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담배를 피우는 똑같은 장면을 철창을 통해 가려지게 보이는 쇼트로 다시 반복함으로써 이 인물을 보는 감독의 위치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교도관은 죄책감과 불안을 가진 한 인물에서 철저히 폭력의 주체인 인물로 변화한다. 이는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에 인물 내적인 변화하고 할 수는 없지만, 관객들이 인물을 통해 느끼는 정서가 180도 바뀐 것이다. 그리고 수감자들에 대한 무차별한 폭행 이후에 교도관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한다.


살해 전 하늘과 함께 잡히는 로우 앵글 쇼트나 계속 목이 잘려 나오는 디 프레이밍 쇼트에서 이미 그의 죽음은 암시된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은 그의 어머니의 상태다. 아마도 요양병원인 것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그의 어머니는 정신을 놓고 있다. 이것은 이전 장면에서 수감자들의 가족들이 그들을 열렬히 지원해주는 데에 비해 정작 폭력의 주체인 교도관은 가족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또 다른 폭력을 통해 살해당한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을텐데, 일단 중요하게 보아야할 지점은 이 살해의 지점이 가족들 앞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또한 폭력임을 인지하고 있는 감독의 윤리가 보인다. 교도소 안에서 이루어진 수감자들에 대한 폭력도 폭력이지만 그들이 외부에서 교도관을 살해한 이 장면을 이러한 상황에서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시위 방식에도 일부 잘못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권에 관한 이야기


바비 샌즈를 필두로 수감자들이 행하는 시위의 방식은 바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담요 시위는 바로 입을 것, ‘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옷이란 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 지위와 계급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옷을 포기한다는 것은 외부의 어떠한 폭력에 스스로를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서 교도관을 따라오는 ‘불안’이라는 감정은 옷을 벗고 성기를 드러내는 수감자들의 장면을 통해 연결된다. 또한 수감되었지만 스스로 생활하는 공간에 똥을 칠하고 오줌을 문밖으로 내보내는 행동들은 스스로 주거의 권리, ‘주’를 포기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왜일까, 그들이 모포 한 장을 걸친 모습은 초라하지 않다. 벽에 칠해진 그들의 똥으로 만든 문양들은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기본권을 내놓으면서도 비굴하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물론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욕망은 존재한다. 새로 들어온 수감자인 길런은 철창 밖으로 만져지는 바깥의 공기, 즉 자유를 갈망한다. 바비가 면회를 통해서 간신히 라디오 전파를 잡아 바깥 소식을 들으려 한다면 길런은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는, 어찌보면 인간성이 결여된 채 사회적 지위를 위해서만 살고 있는 수감자들의 모습에 인간성을 더 해준다. 영화는 수감자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하지만 구멍나있는 철창이 막히고 그들의 자유는 더욱 억압된다. 고쳐진 철창을 보여주는 쇼트에 이어 시네마스코프 화변비율을 이용하여 바닥에 누워있지만 미치 벽에 막혀 것 같은 쇼트는 수감자들의 탈출 불가능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수감자들을 따라가던 영화는 이 쇼트 이후에 급작스럽게 변화한다.


사회화와 비사회화


씻는 것을 거부하는 시위중이었던 바비는 교도관에 의해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고, 씻겨진다. 그들은 씻는 것을 거부함으로서 영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저항한다. 그들이 저항하는 것은 영국이라는 사회로부터의 사회화다. 그들은 영국이라는 사회에 편입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세면반대 시위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동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표현되는 이 장면은 마치 가스실에 끌려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나찌가 선택한 사회에서 추방하는 방법으로 무차별 살해라는 폭력을 선택했다면 영국이란 사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규칙으로 강제로 바비와 수감자들을 ‘폭행’한다. 감독 또한 이 행동들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범주로 부감쇼트와 앙각쇼트를 병행해 강렬하게 표현한다. 마치 이 장면은 문명이 비문명을 상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최소의 수단인 ‘옷’마저 포기한채로 폭력 앞에 놓인 수감자들을 볼 때 그 폭력의 수위는 더욱 더 강력해 보인다.


바비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씻긴 이들의 목적은 바로 다음 쇼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바로 바이의 방을 청소하는 장면인데, 원 모양으로 벽에 그려진 마치 예술작품같은 똥들을 중심부터 지워나가는 것이다. 다음 쇼트에 깔끔해진 바비의 모습과 대비되어 교도관들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바로 깨닫게 된다. 이를 보여주는 쇼트가 깔끔하게 정비된 방 내부와 그들에게 지급된 옷들을 보는 쇼트인데, 이는 우리가 이미 초반부에 본 장면이다. 바로 교도관이 옷을 일렬로 나열하고 입고 있는 장면인데, 교도관 쇼트는 더치앵글로, 수감자 쇼트는 수평앵글로 촬영하였다. 이는 감독이 지지하는 바가 수감자들의 위치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두 쇼트의 병치를 통해 사회화된 인물과 사회화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인물의 차이점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쇼트 이후에 그들은 스스로 옷을 던지고 주거를 부순다.


다음 장면은 이에 굴하지 않자 방패까지 들고 완전무장을 한 경찰들이 맨 몸의 수감자들을 구타하는 쇼트다. 감독은 색채로는 검은 옷을 입은 경찰과 흰 살의 맨 몸을,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완벽하게 우월한 상태에서의 경찰과 스스로를 보호 할 수 없는 나체의 수감자들을, 그리고 다수인 경찰과 소수인 수감자들을 대비하며 이를 ‘폭력’으로 규정짓는다. 하지만 감독은 최선을 다해 객관을 유지하려고 한다. 앞서 길런을 통해 수감자들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음을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 한명이 무자비한 폭력에 떨고 있는 모습을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을 십분 활용하여 한 화면에 배치하면서 하나의 쇼트로 표현해 낸다. 시네마크소프 화변비율은 수평적인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인물을 포착하든간에 인물보다 배경의 비율이 더 크다는 지점도 있다. 그 말은 배경과 인물이 대비된다는 점인데, 교도소 내부에서 수감자들을 둘러싼 교도관들을 표현하는 부분이나, 여백을 남기고 인물을 표현하는 지점에서 영국이라는 사회와 끊임없이 싸우는 이 영화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또 다른 폭력, 폭력의 대비


영화는 교도관의 죽음장면 이후로부터 한 쇼트를 지나감으로써 굉장히 다른 톤앤매너로 진행된다. 교도관의 죽음 전까지의 장면은 교도관-수감자의 입장 차이, 그리고 서로를 향한 폭력의 장면으로 진행된다. 이는 서로의 폭력의 장면을 대비시켜 비교하려는 목적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쉽사리 한쪽 편에 서지 않게 하려는 감독의 장치이자 배려이다.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약 16분이 넘는 시간동안의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신부와 바비의 대화 쇼트부터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쇼트를 보고 나서 모두가 느끼는 공통적인 질문을 일단 왜 이렇게 긴 시간동안 촬영을 했는가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첫 장면에서 자막을 통해 이야기 했듯, 이 분쟁기간동안 2천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그것은 영국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IRA에 의해서 이기도 했다.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폭력을 동반한 투쟁은 허용이 되는가? 아마도 감독은 관객들이 앞서 본 장면들을 통해서 사유하면서 바비와 함께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장면은 관객들의 동의를 구하는 장면이자 물리적인 시간을 통해 바비 스스로 죽음을 불사한 단식투쟁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플롯포인트이다. 감독은 이러한 결정의 지점에서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등장인물인 바비 스스로가 스스로의 신념을 증명하는 쇼트를 집어넣었다. 무려 16분간 말이다. 대화씬을 통째로 생각하면 24분 가량이다. 무려 영화의 1/4이다. 이 장면은 세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앉고싶을 때 앉고 싶은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장면의 처음은 바비가 앉고 싶으면 아무 때나 앉으라며 이야기 하지만 신부님이 성직자는 앉으라고 하지 전까지 절대 안 앉는다는 대사로 시작한다. 한 마디의 대사를 통해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그리고 성경을 말아 담배를 피는 이유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서’만 담배로 핀다는 지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레미야서는 구약성경의 한 부분으로, 언제 어디서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그분의 말씀만 실천해야된다고 말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야기다. 그는 유다인들이 바빌론에게 항복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비극조차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되는 인물인데, 이 예레미야서가 유다인들에게 가장 비극적인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를 옆에서 순종하는 삶에 대한 것에 반발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 옆에서 예수를 알아본 도둑에 대한 일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생각할 때 그 도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은채로 낙원에 가기 위해 예수에게 스스로의 신념을 숨긴채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 예시를 통해 스스로 죽음의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낙원이라는 유혹이 다가오더라도 굽히지 않을 것임을 알게된다. 정치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아들인 바비가 신부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목숨을 건 스스로와의 투쟁을 시작하게 되는 16분. 이 장면 이후로부터 감독은 관객들에게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 16분동안 스스로의 위치를 정한다. 바비의 편에 서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고 사회화로부터의 적극적인 탈출, 즉 죽음을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그가 타협하고 가족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 편에 설 것인지 말이다.


맨몸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투쟁


영화는 긴 대화 쇼트가 끝나고 드디어 벽에서 해방된 바비를 보여준다. 바로 바비의 시선방향을 열어둔 쇼트인데, 이전의 쇼트들이 바비의 시선방향을 항상 벽이나 다른 인물들로 꽉 막아서 답답함을 유지했다면, 이 쇼트는 바비가 비로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미련이나 욕심들을 초월하고 결심을 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쇼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쇼트 이후에 다시 등장하는 바비는 굉장히 말라있고, 말라간다. 바비 역을 연기한 마이클 패스빈더의 실제 몸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광경이다. 계속 누워있어야만 하는 바비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감독은 카메라를 움직인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바비가 느끼는 고통을 형상화한다. 중간에 삽입되는 하늘 장면은 이전 교도관이 하늘을 바라봤던 쇼트와 대비되며 바비가 곧 죽음에 이르를 것을 알려준다. 영화의 남은 20여분은 점점 말라가는 바비의 몸을 지켜보는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바비는 죽음을 맞는다. 바비의 죽음은 의미가 있는가? 바비의 죽음은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영화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성공인 것인가? 그는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목적을 이뤄낸 것인가? 그리고 그 방법은 올바른가? 나의 입장에서는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자신의 죽음으로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물론 기폭제는 될 수 있지만 돌파구는 될 수 없다. 사회의 변화는 이런 죽음을 발판으로 해야 한다고 당연시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이 삶을 담보로 단식투쟁을 하는 처절함보다 그들이 기존에 행했던 투쟁들에 나는 더 동의하는 바다. 영화는 이러한 질문들에 복잡해진 우리들에게 몇가지 활로를 열어준다.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장면이다. 바비의 어린시절로 보이는 소년을 바비는 마주하게 되고, 마지막 쇼트에서는 병들고 움직이지 못하는 바비의 현재모습과 반대로 숲을 뛰어가는 바비의 헐떡이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은 바비의 마지막 단식투쟁이 가지는 성격이 단순히 정치적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16분의 대화쇼트에서도 암시되었던 것처럼, 이 단식 투쟁은 정치적 의미를 가진 쇼가 아니라 바비라는 한명의 인간이 마치 크로스컨트리처럼 스스로의 역량과 스스로의 삶의 에너지와 마주하고 싸우고 이겨내고 고통은 견디는 과정인 것이다.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의미가 합쳐지는 장면들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헝거>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읽혀야 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의, 식, 주로 대변되는 생존권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유지할 것인지 멈출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있다. 하지만 난 <헝거>가 삶을 멈추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비가 어린시절 활기차게 숲을 뛰는 장면처럼 그는 먹는 것을 멈춤으로 인해 더욱 삶과 치열하게 싸우고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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