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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 Dante Mar 09. 2020

냉면과 이자

오늘도 친구가 전화를 했다. 바쁘게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오겠다니 반가웠다. 몇 달간 못 본 그간의 안부와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밥때가 다되었다. 친구는 냉면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이북인 는 아버지를 따라 면옥에 다니던 시절을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하고 있다. 는 오직 함흥냉면만 고집해서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함흥냉면집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친 가 내게 말했다.       


“야, 이제부터 냉면 값은 전부 네가 내는 거다.”

“갑자기 뭔 소리야?”

“당연하잖아. 네가 그 애 후견인이잖아.”

“그거 하고 냉면 값하고 뭔 상관인데.”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줘야겄냐? 계산을 때려봐라.”

“무슨 계산?  아, 이 자식 진짜.”     


대학입시를 앞두고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 있었다. 그는 대학에 간 뒤에도 자주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도 신의 손이 한번 더 스친 아이라 할 수 있었다. 학업성적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성격과 마음 씀씀이가 다른 학생과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늘 흐뭇했고 나름 기대하는 바가 컸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그해,회사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그에게 나는 학업능력과 품성, 평소의 그의 사고방식과 사회문제에 대한 태도 등을 고려해 회사원보다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변호사의 길에는 마음이 금방 움직였지만 선뜻 로스쿨 진학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학비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충당해야만 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였다. 대학 다니던 중간에 2년이나 휴학을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중간에 잘린 뒤 밤늦은 시간에 내게 전화해서 너무 힘들어서 대학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 그였다.      


평소 남의 인생에 배 놔라 감 놔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지만 이 일만은 다르게 생각되었다. 그의 집안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선뜻 진로변경을 권유한 나는 남의 인생에 배 놓아라 끼어든 죄로 그에게 로스쿨 진학을 위한 무언가 방법을 찾아줘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 형편이 선뜻 그를 도울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렇게 궁리만 하고 있을 때 나의 사무실로 놀러 온 친구가 지금 내 앞에서 냉면을 먹고 있는 이 작자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가 그의 회사의 민사소송건 이야기가 나왔고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를 장장 일주일간 온갖 애원과 협박으로 구워삶았다.  제자의 로스쿨 학비를 대라고. 안 그러면 친구고 뭐고 인연 끊어버린다고.     


나의 애원과 협박에 손을 든 친구는 제자를 사흘 연이어 만나서 얘기하고 밥 먹고 산에 가고 목욕탕 가고 한 다음에 내 앞에서 계약서 한 장을 썼다. 그 계약은 친구가 제자의 로스쿨 학비를 대는 대신 제자가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면 수시로 친구 회사의 법률자문을 해주기로 하되 자문료는 그 금액이 로스쿨 학비 총액에 이를 때까지는 지급하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의 회사는 중소기업이기도 하고 업종의 성격상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기에 자문료 조항은  유명무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고 친구 또한 제자를 도우는 일에 나름의 생각도 있는 것 같아서 이 계약은 제자와 친구 그리고 나를 만족시켰다.   


그 후 제자는 로스쿨에 진학했고 친구는 계약조건을 충실히 이행했다.

  

맞다. 이 작자는 지금 그가 낸 학비의 이자를 내게 냉면 값으로 가름하겠다고 선포하는 중이다. 셈법은 역시 장사꾼을 당해낼 수 없다.  


가만있자. 네 말대로 찬찬히 계산을 때려보자. 냉면 2인분에 사리 포함 26,000원, 홍어회무침 24,000원, 석쇠불고기 14,000원, 백세주 8,000원,  합계 72,000원. 이 돈이면 일 년에 4번만 내도 이 작자가 학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은행에 예금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이자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이 작자가 냉면 값으로 내게 가르치는 중이다.     


친구는 냉면을 맛있게 해치우더니 홍어회무침과 석쇠불고기를 안주삼아 백세주 한 병을 거의 혼자 들이붓고 나서 냉면 맛에 이어 백세주와 안주의 어울림을 세상사를 곁들여 일장 연설로 풀어놓으며 연신 나를 향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궂게 날다.           


이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어떤 경우에도 칼집에 한 칼은 준비해두라고.   

  

주섬주섬 서류가방과 겉옷을 챙기는 친구를 향해 내가 지나가듯 던졌다.    

 

“그 애가 그러더라. 지난번에 네가 불러서  네 집에 갔더니  큰딸 같이 옆에 앉혀놓고 녁밥  차려줘서 아주 잘 먹고 왔다고."


친구가 일어서며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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