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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 Dante Mar 11. 2020

낙산을 오르며 만난 사람들

동대문에서 시작하는 낙산의 성곽길을 찾았다. 낙산은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이다. 가파르지 않은 능선의 산책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산성 길은 이른 오후임에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외국인 관광객도 보인다.      


얼마 가지 않아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내게 젊은이 참 잘도 걷네 하신다. 누군가로부터 젊은이 소리를 듣기는 참 오랜만이다. 같이 길가 벤치에 앉았다. 가까운 창신동에 사신다는 할아버지는 보리 고개를 못 이겨 남쪽 고향을 떠나 23살 때부터 광장시장에서 지게꾼으로 40여 년을 일하셨다.

    

"자식들 모두 지게 삯으로 가르쳐 결혼시키고 나니 이제 남은 건 불편한 몸뿐"이라며 허망해 하신다. 깊은 주름과 굽은 허리가 힘들었을 삶을 말해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다섯 살에 해방을 맞고 그 후 수십 년 세월을 오직 지게 하나로 버텨온 할아버지의 몸은 지금 아프다.

    

동대문 창신시장 골목에서 산 빈대떡을 나눠 먹으며 할아버지의 살아온 얘기를 한참이나 들었다. 자식의 짐이 되는 것도 싫고, 옹색해도 정붙여 살아온 창신동 비탈 집과 이웃을 떠날 수 없다는 할아버지. 나와 헤어지며 힘줄이 튕겨 나온 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열심히 살라고 하신다. "힘들어도 살아야지 별 수 있는감"하시며.   

   

할아버지와 헤어져 성곽을 따라 오르다 멀리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신동 집들을 바라본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 배경을 잡고 앉은 동대문이 낯설어진다. 조금 더 걸어가니 조그만 정자가 나온다. 정자에는 외국인 세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네 온다. 의외다.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외국인이 우리말로 인사를 걸어오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가서 앉았다. 그들은 서울 근교 가구 공장에서 일하는 네팔사람들로 이곳 이화동에 방을 얻어 같이 산단다. 인사성 밝은 그는 쾌활하고 이야기에도 거침없다. 같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스스럼없이 인사한다. 활달한 세계인인 그의 용기가 부럽다. 한국이 어떠냐고 물으니 네팔에서 5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한국에서 1년이면 모을 수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굿", "최고"를 연발한다. 귀국하면 네팔에서 운수사업을 시작하겠단다.


옆의 말 없는 그의 친구는 한국이 어떠냐는 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마시던 맥주를 다 비우고 다시 한 캔을 딴 뒤, 그는 다음 달에 귀국한다고 무표정하게 말한다. 당초에 한국에 있기로 계약한 기간보다 2년을 앞당겨 돌아가는 거란다. 이유는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고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아파서라고. 돈은 좀 벌지 않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흔든다.     


"이렇게는 더 못 살아요. 사는 게 아니에요."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하던 양계를 다시 하며 살겠다는 그의 깊은 눈이 붉어졌다. 같이 한국에 들어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월급을 받는 두 사람의 삶이 이렇게 다르다니. 무엇이 그의 한국에서의 삶을 힘들게 했을까?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는 그들은 한국에 오기 전에 네팔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에 오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치러야 했다. 그의 사연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내게 말없이 캔맥주 하나를 더 권했다.  

   

앞의 두 사람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또 한 친구는 한국에 들어온 지 다섯 달이 넘어가고 있고 신혼의 아내를 두고 온 거란다. 수줍은 얼굴의 그는 한국이 어떠냐는 물음에 "너무 빨라요"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너무 재촉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서툰 그의 일손을 주위의 한국 사람들이 무던히도 닦달했던 모양이다. 그의 꿈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새로 집을 짓고 조그마한 가게를 여는 것이다. 세 네팔인은 그들만의 꿈꾸는 삶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지금 내 꿈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그들과 헤어져 제법 따뜻하기까지 한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이번엔 이화장 가는 길을 묻는 하얼빈에서 온 중국인 모녀를 만났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딸은 한국의 해방 이후 역사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혹시 조선족인가 했더니 아니란다. 아버지가 한국 관련 비즈니스를 해서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그녀는, 이번이 네 번째 한국방문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을 공연 현장에서 들어보는 것이 이번 방문의 우선 목표란다. 나 자신도 자주 듣지는 않는 국악 '수제천'을 스마트폰에 저장해두고 있었다. 한국의 팝도 아니고 궁중음악을... 놀랍기만 하다. 무엇이 그녀를 한국 전통음악으로 이끌었을까?


중국인 모녀는 이화장 쪽으로 비탈진 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고 나는 부침개와 음료수 등을 파는 가게가 있고, 바로 앞에 조그만 화단을 끼고 있는 공터의 평상에서 쉬었다.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고 있다. 백발의 할머니는 뜨개질을 보지도 않고 잘도 하신다. 가게에서 나온 아주머니와 반갑게 인사하며 누구 아빠는 언제 오냐고 묻는다. 부침개를 내게 먹어보라고 권하는 할머니는 이화동 토박이다. "내가 이화동의 산 역사지, 이제 나도 이화동 뜰 때가 됐어"라고 하신다.     


몇 년 전부터 재개발 얘기가 나와 이제나저제나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볼까 했더니 이젠 감감하단다. 늘그막에 편하게 남들 다 산다는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 볼까 했더니 그것도 맘대로 안 돼 하신다. 이곳 낙산 자락에서 찬바람 맞으며 한 세상을 다 보냈다는 할머니. 이제 늙어 남은 한 세월은 편안하게 살다가야지 하신다. 가족을 묻자 이 땅엔 없어 하신다.     


자식 셋 모두 다른 나라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고 영감하고 둘만 남아 있다며 그래도 내 나라 땅은 떠나 살기 싫다 하신다. 할머니의 바람은 20평짜리 아파트의 겨울에 찬바람 들지 않는 방에서 사는 것이다. 거동이 어려워 지금처럼 집 고쳐가며 살기 어렵단다.     


"그래도 나랑 영감 살아 있고 서로 기대고 살고 있으니 잘사는 편이야."   

  

옷 바느질 하나로 60여 년을 동대문 자락에서 살아온 할머니. 눈만 제대로 보이면 지금도 옷 한 벌 끄떡 없이 해낼 수 있다며 웃는 할머니. 알고 보면 할머니는 동대문 의류산업을 출발시킨 세대가 아닐까?     


이제 낙산 산마루에 이르렀다. 멀리 북악산이 보인다. 산과 도시를 파노라마로 훑으며 찍고 있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생김새는 한국인인데 둘의 대화는 영어다. 먼 산을 배경으로 둘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둘은 모두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 이민자 두 가정의 아들, 딸이다.     


서로 이웃으로 같이 자라 지금은 모두 UCLA에 다니고 있단다. 생물학을 전공한다는 여학생은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해 외과의사로 일할 계획이고, 사회학을 전공한다는 남학생은 졸업 후엔 부모님의 사업을 이어받을 계획이란다. 부모님의 나라 한국 방문은 처음이라는 그들은 간단한 인사말 이외에는 우리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절에서 보낸 이틀을 한국에서의 최고의 날로 꼽았다.     


이제 내리막길을 걸어 넓은 놀이마당에 오니 대학생들이 인형극을 준비하고 있다. 동아리 인형극 야외 리허설이란다. 주위에는 야외 학습 나온 중학생들이 선생님의 주의사항 외침에는 아랑곳없이 장난치고 있다. 의정부에서 왔다는 학생이 성곽이 어디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 바로 옆에 자신이 기대고 놀던 벽이 성곽임을 모르는 그에게 성곽 얘기를 하다가 화제가 남한산성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이 아이들을 부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먹이려 애를 쓴다. 아이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 제 키보다 훨씬 큰 인형으로 달려든다. 아이는 인형극에 방해 될까 붙드는 엄마의 손을 계속 뿌리친다. 임시로 설치한 무대 위에서 인형이 춤을 춘다. 음악은 빨라지고 인형이 도는 속도도 빨라진다. 아이도 인형을 따라 빙빙 돌다 넘어진다.      


어느새 아이와 인형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낙산의 하루가 가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낙산의 하루가 가고 있다.





***필자의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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