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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Apr 23. 2024

갈등을 사람과 동일하게 보지 않고

존중과 친절,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 의논드릴 것이 있습니다."

간단한 보고를 한 후 행정실장님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네, 앉으세요."

"말씀을 드려야 할까 망설이다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 그때 해야지요. 속에 넣어두면 곪아 터집니다. 하하. 어서 말씀하세요."

"결재 진행 중 문서에 아직까지 붕 떠있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올리신 통학로 교통안전시설 개선 의견 제출에 대한 내용인데, 사실 학생 통학로 안전 관련은 안전교육 업무 담당에서 할 일이지 시설 담당 일은 아니거든요. 첨부 문서에 작성자가 시설주무관으로 되어 있고 실장 협조 결재가 올라와 있는데 행정실 소관 업무가 아니라 결재 안 하고 있습니다."

실장님은 보고 공문의 첨부 문서에 작성자를 안전교육 담당 교사로 바꾸고 행정실장 협조 결재를 빼는 것이 맞다며  *** 선생님과 있었던 다툼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행정실과 선생님 간에 몇 건의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화장실 불법카메라 단속 건도 점검은 시설주무관과 함께 하지만 장비는 시설이 아니므로 담당에서 보관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현장체험학습 차량 운전자의 음주 측정의 경우 수학여행이나 전교생 현장체험학습 등 행정실에서 버스를 계약하는 경우는 행정실에서 하지만 그 외 일일 체험학습 등은 해당 학년에서 실시하면 좋겠다고 했다.


실장님 말이 끝날 때까지 경청했다. 통학로 교통안전 관련은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대략적인 내용을 들어서 진행사항을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교감선생님은 행정실의 업무 협조와 관련하여 선생님들 사이에 불만의 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했다. 공문 보고일이 말일이라 기한이 남아 있었고 안전교육 담당 교사도 초중학교 종합체육대회 출전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의 말을 들은 후 복도에서 그 선생님과 마주쳤을 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나는 선생님들 돕기 위해 있는 사람이니까" 하며 스트레스받지 말고 일하라고 토닥여 주었었다.


실장님이 적절한 타이밍에 갈등사항에 대해 말을 꺼내 주어 다행이었다. 나는 실장님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학교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교장을 비롯하여 교감, 행정실의 역할은 선생님들이 학생들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업무 스트레스나 감정 소모로 교육력이 저하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로 돌아가니까요."

"그건 맞습니다."

실장님은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업무 경계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행정실 존재 이유 어쩌고 이런 말까지 나온 김에야 저도 참기 어렵고 행정실 직원들 챙겨야 하고요."

나는 실장님 입장에서 행정실 직원들을 보호하고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보자며 대화를 일단락 지었다.


전자결재에 떠있는 통학로 관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하주차장로 진입하는 차도의 실선을 점선으로 바꾸어 교직원과 일반 차량이 유턴하지 않고 바로 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개선해 주면 좋겠다는 것, 통학로의 횡단보도 진입 바닥에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페인트가 많이 벗겨져 재채색이 필요하다는 것, 현장체험학습 차량 정차 구간을 표시해 달라는 것 세 가지였다. 이 세 가지는 어린이 교통안전과 교직원 일반인 교통안전이 중첩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현장체험학습 차량 운전자 음주 측정과 관련해서는 다른 학교의 사례를 들어보았다.  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실장님과 통화하고 다른 학교 교장선생님께도 여쭈어 보았다. 이 경우는 학교 규모와 행정실 사정에 따라 학교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결론을 얻었다.


실장님을 교장실로 불렀다. 나는 초등학교 행정실이 잡다하게 신경 쓸 일이 많아 수고가 많다며 말을 이어갔다. 1월에 우리 학교로 오신 실장님과 차장님은 주로 중등학교에서 근무한 경력이 많아 초등학교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 돌봄, 유치원, 교육공무직, 특수반 게다가 교육활동 가짓수도 많아 챙길 것이 많지요. 게다가 행정실 직원도 적어서 어려움이 많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실장님께서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통학로 건은 살펴보니 학생 안전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도 없겠더라고요. 교직원 일반인 차량 통행과 아이들 교통안전이 중첩되어 있으니 이번 건은 시설주무관님을 작성자로 하여 결재하고 처리하면  좋겠는데요."

"중첩되는 면이 있긴 하죠."

"그리고 음주 측정 건 말인데요. 시설주무관님이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선생님들은 학생 관리와 지도에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건 좀 어렵습니다. 선생님들이 체험 전날 음주측정기를 미리 챙겨두고 당일 버스 안에서 '후' 한 번만 불면 됩니다. 아이들 관리에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간제 시설주무관을 제외하면 실장과 차장 두 분이서 행정실 업무 전체를 처리해야 하니 실장이지만 업무가 많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통학로 교통안전시설 개선 건과 현장체험학습 차량 운전자 음주 측정 건은 하나씩 양보하여 조정하였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선생님과도  소통했다. 통학로 교통안전시설 개선 건은 실장님이 결재해서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 학교 행정실이 직원이 적어서 일일 체험 학습에 한하여 차량 운전자 음주 측정은 체험반 담임교사가 음주측정기를 전날에 미리 챙겨두었다가 당일 측정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고 이해를 구했다. 선생님은 갈등을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갈등 상황 때문에 선생님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민되는 일은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언제든지 편안하게 소통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관리자의 존재 이유, 선생님들을 돕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종종 교무실과 행정실 간의 업무 갈등이 생긴다. 학교 업무라는 것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다 보니 학교마다 이러한 갈등으로 관리자들은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교육청도 각각의 직무 종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명확한 업무 표준안을 제시하기를 꺼려한다. 문의하면 학교의 사정에 따라 잘(?) 협의해서 하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해가 된다.


갈등 조정은 학교장의 역할이다. 선생님들은 학생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행정업무를 부담스러워한다. 행정실은 학교 시설 관리, 예산 운영, 교육공무직원 관리 등 행정실 본연의 업무 외의 학생 교육활동과 관련된 업무는 본인들의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학생 교육활동도 예산과 관련되어 있고 선생님들은 예산 사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도 있어  행정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다. 학교장은 이러한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학교 조직의 수레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직원들의 마음을 읽고 서로 수긍하며 협력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을 찾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 조정의 출발은 학교 조직의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장이 평소에 교직원을 존중으로 대하고 아낀다고 느끼면 갈등 상황은 순조롭게 해결되는 것 같다. '인사가 만사'이고 구성원에 따라 학교 조직의 분위기도  달라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최고 경영자인 학교장이 존중과 친절, 책임을 다하는 모습으로 조직의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젖어들 것임을 믿으며 말이다. 발령을 앞두고 평소 존경하는 선배 교장선생님을 만나 차를 마시며 들었던 말을 기억한다. "직원 탓할 것 없어. 모두 교장이 안고 가야지."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갈등과 사람을 동일하게 보지 말고 진솔하고 지혜롭게 소통하며 구성원 모두가 '조직의 중요한 일원'이라고 느끼도록 세심하게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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