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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Oct 07. 2024

비 온 뒤 산길

찌찌, 삐삐, 조롱조롱, 초초

귀여운 새소리

나뭇잎에 앉은 부드러운 햇살

그 사이 보이는 파란 하늘

산들거리는 바람

촉촉하고 폭신한 흙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이토록 감사할 수 있다면.





밤사이 비가 쏟아졌다. 재량휴업일이다. 남편은 출근이라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아침을 먹었다. 상근예비역 아들도 휴가를 얻어 늦잠의 은총을 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하게 있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창을 보며 자리 잡은 책상에서 일본어 공부를 했다. JPT 900점 이상을 목표로 공부해 보자고 10월을 시작하면서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녹슨 머리를 굴리면서 공부하는 고요한 이 시간이 참 행복하게 느껴지는 거다. 조용하고 느긋한 아침 시간은 축복이다. 공부하다 말고 일기장을 꺼내 감사일기를 썼다.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이 시간이 감사하다고 썼다. 오롯이 나인 시간에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보인다. 사람들 속에서 날뛰던, 왔다 갔다 초조하고 불안해지고 마는 유리멘털도 제자리를 찾고 단단해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자리를 잡아가는 한 존재가  이순(耳順)의 나이로 나아가면서는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무언가다. 노년에 들어서도 흔들리는 모습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시간을 살고도 흔들린다면 삶에 대해 치열하게 아니 깊이 사고하지 못한 나의 안일함과 게으름 탓일 테다. 귀는 순해지고 자신을 잘 알아 스스로 편안하고 좋아하는 시간만을 살아도 충만해지는 노년을 살고 싶다. 내가 아는 단 몇 명을 서로 잘 돌보는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사이 마음은 이미 산길을 걷고 있다. 


비 온 뒤 산길을 걷는  것은 충만 그 자체다. 가을이고 아침이다. 햇살이 맑고 부드럽다. 땅은 촉촉하고 폭신하다. 길섶마다 풀잎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싱그럽다. 바람이 산들거린다. 나뭇잎이 사르르 손짓한다. 작은 새소리가  귀엽고 생기 있다. 그 발랄함이 고요한 숲을 이따금 깨우는 소리가 반갑다. 물소리가 쏴쏴 청명하고 경쾌하다. 발걸음이 가볍다. 덩달아 마음도 통통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살아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이다. 


존재가 다른 존재를 온전히 살아있게 느끼게 하는, 살고 싶게 만드는 이런 날 이런 순간을 자주 마련할 일이다.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껴도 느껴도 모자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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