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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비 Nov 15. 2018

벌거벗은 시간

Prologue



 

 배낭을 꾸리는 게 어색하지 않을 무렵 돈벌이를 시작했다.

배를 곯지 않을 만큼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이코노미석에 앉아 기내식을 만끽했다. 다리를 뻗을 수도 맘 편히 몸을 기댈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고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글을 끼적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긴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을 장면과 인연을 상상하면 촌스럽게 매번 두근거렸다. 청춘이 아깝지 않았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고 돈을 버는 유일한 이유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력서 대신 비자 신청서를 썼다. 걸음을 떼기 전 반년은 고시생처럼 살았다. 다만 법과 언어가 아닌 여행기 속 장면과 사람을 읽었다. 하루는 아시아를 횡단했고 또 하루는 유럽의 동쪽 끝을 서성였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히말라야와 알프스의 설산에 조심스레 내 모습을 덧댔다.

  

 낭비라고 했다. 사치라고도 했다. 점잖게는 잊혀지는 잠깐의 즐거움이라고 했고 과격하게는 쓸데없는 돈 낭비라고도 했다. 단테의 말에 홀려 내 길을 따랐고 사람들은 떠들도록 그냥 내버려뒀다. 그렇게 생긴 낭비벽이 버릇이 됐다가 뗄 수 없는 굳은살로 박혔다.

 말마따나 시간과 돈을 잃었다. 그 벌거벗은 시간 위에 낯선 장면과 본적 없는 감정을 담았다.

                      

 낭비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이다. 바람도, 햇살도, 두근거림도. 그리고 당신.


 덧)이제 그 낭비의 흔적들을 조금씩 나누려고 합니다. 불쑥, 울컥 튀어나온 그 감정과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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