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공의 이력일까? 실패의 이력일까? 아니, 이력서엔 실패의 이력 따윈 쓰지 않는 것이 디폴트 값인데 내가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성공의 이력이 맞을까? 지원자의 성공 이력, 그게 정말 가장 중요할까? 성공 만렙 경력자를 뽑으면, 일을 잘할까?
나는 실패의 경력이 꽤 많다. 그 많은 실패의 경력은 다이어리에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내가 실패를 하고 싶어서 실패의 이력을 만든 건 아니다. 다이어리는 나의 실패가 근원이 있는 실패임을 기록하고 있다. 근원이 있는 실패는 하나가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실패의 이력서를 적는 란이 있다면 나는 실패의 경력을 A4 10장은 너끈하게 채울 수 있다. 이게 무슨 자랑인가 싶지만, 내게는 자랑스러운 실패의 이력들이 다이어리에 날짜와, 세부적인 실패 사항들이 자필로 적혀있다. 내실내록(내가 한 실패, 내가 기록)이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명화가 70대에 어느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어 안 좋은 점이,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실패할 기회를 달라
젊은 날에 이미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원하는 것이 '실패할 기회' 라니. 정명화는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의 바이올리니스트 거장은 오늘도 성장하고 싶고, 그래서 실패의 기회를 달라고 엄살이 아니라(이게 엄살이라면 너무 귀여우신 거고) 진심(이게 진심이어서 브라보를 외치게 되는 거고)으로 호소한다.
실패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인물 하면 일론 머스크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투자자와 회사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론의 최고의 미덕은 그가 실패의 경력자라는 점이다.
일론 머스크는 2002년 우주 탐사기업인 SPACE X를 창립했다. 항공우주 장비를 제조, 생산한다. 로켓을 만들고, 우주선을 만드는 사이즈는 일개 개인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가적인 사이즈, 그것도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정도의 대형 사이즈에서나 가능한 일이겠거니 했는데, 일론은 일개 개인으로 우주 회사를 차리고, 로켓을 만들고 사람을 태워 우주로 사람을 보내고, 다시 지구로 소환시켰다.
일론은 어떻게 국가적인 빅 사이즈의 우주 탐사를 시작하고, 또 성공하게 됐을까?
거기엔 '실패'의 이력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다. 일론 머스크는 '실패를 개발에 포함시킨다.' 2022년 제작된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RERURN TO SPACE'는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과정을 다룬다. 다큐의 핵심은 '실패'에 있다. SPACE X에서 제작과 비행 신뢰성을 담당하고 있는 엔지니어 한스 퀘닉스만(Hans Konigsman)은 "일론의 장점은 실패가 개발의 과정이라는 걸 이해한다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일론이 실패에 관대하니, 엔지니어들은 성과를 위한 수많은 실패를 마음 놓고 하게 된다. 일론 머스크에겐 딱 세 번, 우주선 괘도 진입 트라이에 필요한 비용밖에 없었다. 일론 머스크는 알다시피 세 번의 우주 괘도 진입 실험에 모두 실패한다. 스페이스 X의 대표이자 COO인 그웨인 샷웰은 세 번의 실패에 대해 '배웠다'라고 표현다.
궤도에 오르는 건 어렵지만 첫 번째 비행에서 많이 배웠고, 두 번째 비행에서 더 많이 배웠고, 세 번째 비행에서는 정말 많이 배웠어요. 날아오를 준비가 된 거죠. -그웨인 샷웰 SPACE X 대표 겸 COO
SPACE X 직원들은 세 번의 실패 후, 일론 머스크가 화를 내면서 우주선 발사 계획을 중단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런데, 일론은 세 번의 실패 후 이미 비용이 바닥난 상황에서 직원들을 독려하고 다시 도전하자고 말한다.
일론 머스크는 네 번째 비행에서 민간에서 개발한 우주선 최초로 지상에서 우주 괘도 진입에 성공한다. 일론 머스크의 성공 방정식은 NASA와 여러모로 달랐는데, NASA는 모든 걸 이론적으로 먼저 풀고, 과정마다 컨펌을 받아 완벽한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단정하에서만 일을 수행했다. 반면, SPACE X는 일단 만들고 취약한 부분을 찾고, 거기서부터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실패를 감수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실패의 감수'다. 실패의 감수는 비용이다. NASA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과 인간은 실패를 싫어하고, 실패로 인한 비용 손실을 몹시 싫어한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실패가 개발의 과정이고, 실수를 하고 바로 잡는 것, 그것이 성공의 방정식이라고 몸으로 보여준다.
더 많은 로켓을 만들어 발사하는 게 중요해요. 모든 로켓, 모든 발사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일론 머스크
2018년 tvn에서 화성을 주제로 한 SF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갈릴레오: 깨어난 우주](이하 갈릴레오)가 방송된 적 있다. 김병만, 세정, 하지원, 닉쿤과 탐사 전문가가 출연했다. 갈릴레오는 미국 유타주에 있는 화성 탐사 연구기지(Mars Desert Research Station, 이하 MDRS)의 생활을 담았다. MDRS는 화성에서의 삶을 시뮬레이션하는 곳이다. 출연자들은 우주인 복장을 하고, 우주선에서 생활하며 화성을 탐구한다. 출연자들을 MDRS의 직원인 아틸라와 일라리아가 돕는데, 아틸라가 세정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가수이자 요즘은 연기자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세정은 아틸라에게 자신은 잘하는 게 없는, 실수투성이라고 자책한다. 이럴 때 자동적인 대답은 '괜찮아 혹은 잘하고 있어."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틸라는 세정에게 실수를 더 하라고 실수를 부추기며 심지어 화성 탐사 연구기지의 목적이 '실패'에 있다고 말한다.
여긴 실패하러 오는 곳이에요. 실패를 안 하면 바보죠.
나는, 아틸라의 저 말에 MDRS에 우리 집 꼬맹이들을 보내려고, 절차와 비용을 알아봤다. 세상에 실패하러 가는 곳, 실패를 안 하면 바보인 곳이라니...'어머 이건 보내야 해.'
아이들이 저곳에 가서 실패의 경험을 다이어리에 가득 적어보면 좋겠다. 실패를 하는 것이 것이 바보가 아니라, 실패를 안 하는 것이 바보라는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 나도 실패하러 가고 싶다. 다이어리에 실패를 기록하러 가고 싶다. 실패할 기회를 마음껏 누려보고 싶다.
세상은, 성공만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력서엔 성공만을 쓰는 것이 디폴트 값이다. 그런데, 성공은 실패의 숱한 경력이 필요하다. 다이어리엔 성공 따위 몇 개 없다. 실패의 기록만 가득하다. 나는 실패 경력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