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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17. 2024

하나만 키워봐서 몰라서 하는 소리

그걸 거기다 써먹냐?

한강 작가가 쓴 <종이피아노>라는 산문에는 한강 작가가 초등학교 5학년즈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서 엄마를 졸랐던 일이 담겨있다.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교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면서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딸을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경제적 사정이 나아졌는지 아버지가 딸을 불러서 피아노를 배워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한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일 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이 말에 딸에 대한 사랑,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일의 원인은 부모에게 있고, 이제야 피아노를 배우기를 권하는 이유는 내 마음 때문이라는 걸 명확히 말했다.     


이 글을 읽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을 때 내가 초밥이한테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빠와 헤어지는 건 엄마가 100퍼센트 잘못한 거야. 엄마를 원망해도 되고, 화를 내도 되고, 엄마를 미워해도 돼. 아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딸한테는 부모로서 미안했다. 부모가 마음대로 결정해 놓고, 이해를 바라는 건 아이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니까 어떤 변명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화를 내도 된다고,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했다.     


사실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당시에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행복하게만 해주고 싶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게 미안하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던 것 같다. 딸이 화라도 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딸과 나의 관계는 나는 원해서 이 일을 하지만, 너는 이해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런 맥락으로 이어졌다. 서로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한마디로 ‘반박할 수 있는 관계’다. 


신기하게도 초밥이는 친구들이 엄마랑 싸웠다고 하는 걸 들으면,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혼날 수는 있어도 싸우는 건 이상하다면서. 초밥이는 반박은 해도 대든 적은 없다. 평소에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감정과 함께 쌓아놓으면 터져서 싸움이 되는 게 아닐까.


부모가 먼저 자식의 권리를 인정하고,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때 부모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부모의 권위는 자녀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생기는 것 같다.


지극히 단편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우리 아버지가 늘 하는 말처럼 ‘초밥이 같은 애’ 하나만 키워봐서 몰라서 하는 소리일 수 있다. 초밥이는 내가 카톡을 하면 답장을 꼭 하고, 아니면 하트라도 달아놓는다. 그런 작은 행동에서 잘 키운 것 같아서, 아니 잘 큰 것 같아서 뿌듯하다. 초밥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선생님, 친구들한테도 작지만 사려 깊은 행동으로 신뢰를 얻는 사람이다. 내가 잘한 일이라면 초밥이를 작지만 사려 깊은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봐주었다는 것밖에 없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 부끄럽지 않도록 내가 잘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걸어왔다.     


최근에 격세지감을 느낀 일이 있었다.     


초밥: 다은이가 비밀을 말하기 전에 나보고 비밀 하나 말하라는 거야. 근데 내가 비밀을 만들 새가 어딨어. 고민고민 하다가 ‘엄마, 아빠 따로 산다’고 했어.

나: 야! 그걸 거기다 써먹냐?

초밥: 그럼 없는데 어떡해.

나: 다은이가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다고?’ 하지 않았냐?

초밥: 맞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어.     


그래놓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8년 전에 커다란 상처라고 여긴 일이 초밥이가 친구 비밀을 듣는 데에 보잘것없는 떡밥으로 사용되고, 우리에게만 통하는 농담이 될지 몰랐다. 그걸 거기다 써먹냐?


   

딸과 나란히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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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공모전 발표가 내일로 다가왔어요. 아직 아무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저는 올해도 물 건너갔나 봐요. 공모전에 응모하신 작가님들은 저처럼 브런치 홈과 메일을 수시로 열어보실 것 같아요. 지금 일어나는 일이 몇 년 후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벼워진다는 걸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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