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너쇼와 교과서 사이에서 길을 잃다
초밥이가 새로 등록한 영어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초밥이는 스터디카페에 있다가 집에 와서 교과서를 가지고 가겠다고 했는데, 초밥이가 집에 들른 시간은 내가 막 수업을 마친 직후여서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학교, 스터디카페, 학원을 오가느라 지쳤을 초밥이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밥이를 차에 태우고 내가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교과서 챙겼지?”
“학교에 교과서가 없어서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 내가 있다고 생각한 건 작년 거였어.”
“그럼 교과서를 잃어버렸다는 거야?”
“그런가 봐. 학교 사물함에 넣어놨는데 사라졌어.”
“그러면 빌려왔어야지. 원장선생님이 너희 학교 학생은 너뿐이라고 가지고 오라고 한 건데 어떡해.”
“대신에 학교에서 준 프린트 다 챙겼어. 어차피 학교에서도 교과서로 수업 안 해. 한 번도 교과서로 수업한 적 없기 때문에 나도 잃어버린 걸 몰랐던 거야.”
갑자기 나는 화가 치밀었다. 초밥이의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학생이라면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학기 초에 받은 교과서가 없다는 게 너한테는 이상한 일이 아닌가 보다? 처음 가는 학원 선생님이 프린트가 아니라 교과서를 가지고 오라고 했으면, 혹시 집에 없을 가능성에 대비해서 친구한테 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고. 없으면 없는 거고, 다른 걸로 하겠지 편한 대로 생각하나 봐.
나는 과외수업할 때 학생들이 교재를 안 갖고 오거나 수업시간을 착각하면 혼냈는데, 너까지 그러는 거 보니까 앞으로 학생들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당연한 거니까 말이야. 당연한 걸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거니까. 맞지?"
차는 학원 앞에 도착했고, 초밥이는 아무 말 없이 내렸다. 혼자 남게 되자 비꼬듯이 말한 건 곧바로 후회했다. 감정만 자극하는 건 누구한테도 도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교과서를 잃어버리고도 당당한 초밥이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외수업을 하면서 쌓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내가 화가 난 이유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날 갔던 학원 원장님은 네다섯 살 시절에 초밥이를 보기도 했던 분이다. 한동안 연락 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내가 전화를 해서 수업을 부탁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를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 말고 태도가 좋은 사람으로 키웠다는 평가. 학원을 폐업한 뒤로 소식을 끊고 지냈지만, 건강하게 지내왔다는 걸 초밥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발끈했던 건 그런 기대가 깨졌기 때문이었다.
가끔 내가 초밥이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 이유를 자문해보고는 한다.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워서인지 아이가 하나여서인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문제는 초밥이를 나의 자부심으로 이용하는 거다. 여기에는 아이를 나에게 속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초밥이가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를 바란다. 나와 이어진 끈 때문에 주춤하지 않고 아득한 곳까지 힘차게 날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잘되야 한다. 글을 더 열심히 쓰고 등근육을 키워야 한다. 내가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날아가서 낯선 것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뒤를 돌아보며 초밥이를 약 올릴 거다. 초밥이를 약 오르게 하는 게 내 꿈이다.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나는 명곡을 남기고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 오빠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다. 표를 손에 넣기까지 나는 공연일정이 나와있는 음악잡지를 사야 했고, 표를 판매하기 시작하는 날 동성로에 있는 서점이 문을 여는 시간에 가야 했다.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너무 들뜨고 기쁜 나머지 아버지에게 콘서트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술 먹는 디너쇼를 니가 왜 가?”
아버지가 콘서트를 내가 알지도 못한 디너쇼라고 이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빠가 디너쇼라고 오해한 이유가 'OO 호텔 별관’이라는 장소 때문이란 걸 나는 한참 후에 알았다. 나는 콘서트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설명했지만, 아버지는 일관성 있게 듣지 않았고 절대 가지 말라는 엄포로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공연날짜를 모르는 아버지 눈을 피해서 콘서트를 갔고, 다음부터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분란을 일으킬 말은 아버지한테 하지 않았다.
이 기억이 떠오르자 어쩌면 교과서가 초밥이한테는 디너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 없고, 자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의 교과서와 지금의 교과서는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잃어버린 교과서는 내 것이 아닌데. 생각 끝에 나는 집에 돌아온 초밥이한테 사과를 했다.
"미안해. 아까 너한테 감정적으로 말한 건 과외수업하면서 쌓인 거랑 내 체면 때문이었어."
"어."
평소라면 내가 사과를 하면 초밥이도 "나도 미안해"라고 했었는데, 그날은 "어"가 끝이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다음날 아침, 이유를 초밥이가 장문의 카톡으로 알려주었다.
"학교에 영어2 교과서 없어서 집에 있는 줄 알았던 건 진짜야. 내가 어제 엄마 차 타기 전에 교과서 챙겼다고 거짓말한 건,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지만) 뭐라고 할 것 같아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 그랬어. 수학이나 다른 교과서랑 다르게 적어도 우리 학교 영어 수업 과정에서 교과서에는 진짜 볼 게 없는걸 내가 아니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거야. 쌤도 교과서 얘긴 꺼내지도 않았어. 학교 영어 선생님이 주신 프린트만 꺼내라고 하고. 그래도 교과서 가져오라고 하신 건 맞으니까 책 안 가져간 내 잘못은 인정해. 그래서 죄송하다고 교과서는 놓고 왔다고 했는데 교과서 가지고 있으시대. 선생님한테 죄송해야 할 부분은 있지만 엄마한텐 없다고 생각해. 엄마가 화낸 건 엄마가 전에 책 안 가져온 학생들한테 화났던 기억까지 같이 떠올리면서 나한테 더 크게 화낸 거 같다고 생각해서 난 사과 안 했어. 지금 이 말도 나 기분 안 풀렸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엄마 혼자 오해할까 봐 얘기한 거야."
하... 대체 내가 얼마나 잘 키운 건가... 약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