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말고 보는 게 생긴 거거든
벌떼방(대학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술잔이 놓인 테이블 사진을 올렸다.
“나 남자랑 술 먹는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뒤적거리던 벌들이 일제히 동요하며 웅웅댔다.
“좋겠다”
“넌 아직 현역이구나”
“누군데?”
반응이 재미있어서 한 마디 더 던져봤다.
“나보고 소녀 같단다야.”
“소녀래 크크”
“할매 아니고?”
“좋겠다. 소녀도 되고”
아닌 게 아니라 남자한테 “소녀 같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소녀일 때도 별로 소녀 같지 않았던 나인데 이건 무슨 소리인지. 초등학교 동창인 형진이는 나의 첫사랑이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창에게 나를 ‘키 크고 얼굴 까만 육상부’라고 설명했다. 내가 육상부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형진이는 첫사랑 동창도 육상부로 알고 있더라며 그러면 된 거라고 했다. 아무튼 내가 하얀 얼굴에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은 소녀보다 달리기는 잘했다.
그분이 한 “준정씨는 소녀 같아요”는 무슨 뜻이었을까.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앞뒤에 온 문장을 연결해보아야 한다는 김영민 교수의 말을 참고해 보았다.
“전처는 준정씨와 좀 다른 스타일이었어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었죠.”
요건 앞에 한 말이고, ‘소녀’ 다음은 이렇게 말했다.
“준정씨는 다른 여자들과 좀 다른 것 같아서요. 순수하신 것 같아요.”
그분은 어떤 경위로 알게 된 분인데, 어느 날 나와 의논할 것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제안을 해왔다. 물론 나는 그 분과 나 사이에 의논할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싱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수락했다.
약속 장소는 내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로 정했다. 평일이라 내가 수업을 마친 후면 저녁시간은 지났고, 밤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에 방해가 되니 카페를 빼고 나니 적당한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백만 년 만에 남자랑 술 마시고 싶었다.
그 분과 전화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자 고민이 시작되었다.
집 앞에 나가는데 잔뜩 꾸미고 나가면 부담 아니 무섭지 않을까. (왜?)
화장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 (마스카라가 어디에 있더라?)
이런 고민을 하는 상황자체가 상당히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풀어서 살짝 드라이를 했고, 옷은 짙은색 통이 큰 청바지에 남색 폴로 니트를 입었다. 그리고 파운데이션을 두드렸다. 속눈썹을 올려볼까 하고 뷰러를 찾다가 삼일 만에 화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그날 나의 외모는 근래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지만, 그분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그분이 한 말의 맥락으로 보면 그분은 이제까지 화려한 외모의 여성을 만나온 분인데 나의 소탈한 스타일에 대해 다소 실망을 한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소녀’와 ‘순수’라는 말로 적당히 포장한 게 아닐까.
가끔 초밥이와 남자 또는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내가 이제 연애를 할 때가 되었다고 하면 초밥이도 지지 않고 “나도” 하는 식이다. 한번은 서로의 이상형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상대는 모르고 나만 아는) 남자를 말하자 초밥이는 이름 대봐, 하고 재빨리 검색했다.
“엄마, 얼굴은 안 봐?”
나는 18년생 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인생을 살지 않았다. 네가 남자를 알고, 연애를 아냐 등등의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 가득 찼지만 겨우 나온 말은,
“어떻게 얼굴까지 보냐?”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굴을 안 보는 게 아니라 얼굴 말고 보는 게 생긴 거거든. 그게 뭐냐고? 예를 들면 ‘친절’ 같은 거. 나는 친절한 정도가 자유로운 정도라고 생각해.”
상대가 어떤 현실을 견디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은 다정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갇혀있지 않아야 손을 잡고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이해시킬 수 없고, 변명이라는 소리나 들을 테니까.
예전에는 내가 호감이 있는 남자든 아니든 인사치레라도 나의 외모를 칭찬하면 안심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내 마음을 확인해서 조금 기뻤다. 적당히 둘러댄 말을 알아챌 만큼 ‘순수’ 하지 않아서 뿌듯하기도 했고 말이다.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는 키 크고 늘씬한 미녀만 찾아다니는 할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어쩌다 할은 사람의 내면이 외모로 보이는 최면에 걸린다. 똑똑하고 선한 로지는 할에게 엄청난 미녀로 보였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할의 친구가 최면을 풀어버리고, 할은 혼란에 빠진다. 로지와 함께한 지난 몇 주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했을 때 평화로운 기분을 처음으로 느낀 할은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최면에 걸리기 전에 본 것이 허상이 아니었을까하고.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