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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 수 있는 모난 글

by 김준정

어떤 음식은 특별히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나한테는 호박죽이 그런 음식이다. 호박, 팥, 찹쌀가루, 물밖에 들어가지 않고, 맛을 내는 감미료라고는 먹기 전에 넣은 꿀과 소금이 전부인 이 음식을 먹으면 달달하고 쫀득해서 입이 즐거우면서도 내 몸에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호박의 계절을 맞아 4일을 연속으로 밥을 하듯이 호박죽을 끓였더니 하루 일과에서 ‘호박죽타임’이 생겼다. 점심을 먹고 두어 시간이 지난 과외수업을 하기 전 출출할 때가 바로 호박죽 타임. 독서대에 책을 펼쳐놓고 아침에 끓인 죽을 데우지 않고 한 국자 떠와서 먹다 보면 마음이 한없이 푸근해진다. 호박자체에서 우러나온 고운 색감과 끓여놓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더 깊어진 단맛을 천천히 음미한다.



*


하루는 시나몬롤이 먹고 싶어서 빵집을 간 적이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봤더니 마침 우리 집 근처에 파는 곳이 있었다. 운동을 갔다가 들른 빵집 진열대에 시나몬롤이 있었다. 그런데 가격표에 쓰인 5,000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냥 가게를 나왔다. 단순히 비싸서만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가격을 지불할 만큼 원하지 않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다. 먹고 싶지만 참는 아쉬움이 아니라 이 돈이면 다른 걸 먹지 하는 가벼운 포기였다.


시나몬롤 1개 = 호박 2.5개 = 호박죽 12그릇


머릿속으로 이런 계산을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내가 원하는 정도와 층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전보다 내 마음을 섬세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글쓰기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나의 하루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을 조금 읽다가 글을 한 시간 쓰고 밥을 해야지, 운동을 다녀와서 점심을 먹은 후에 몇 시부터 글을 고쳐야지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운다. 글감을 모으기 위해 틈틈이 메모를 하기도 한다. 나의 휴대폰 메모장에는 여러 가지 제목의 메모가 있다. 그 제목 중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런 것이다.


딸과 보미(말티즈 10세)와 함께 마트에 걸어가기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고 싶을 때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

반찬통에 담긴 반찬

중간에 안 깨고 자기

혹옥

파김치

가을이 시작될 때 바람

운동 후 갈증을 참았다가 맥주(아이스커피) 마시기

시장 가기

낮잠도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을 때-모순(양귀자), 마시

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정지아), 종이달(가쿠타 미츠요)

식탁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

포도 따 먹으면서 책 읽기

학생결석으로 휴강될 때


메모를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와 관련한 글을 쓰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은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의 내밀한 부분을 손으로 더듬어보는 일이다. 나의 욕망과 기대, 좌절, 원망, 희망을 느껴보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호박죽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아니 호박을 사 와서 죽을 끓여 먹을 생각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좋아했나.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 네일숍, 미용실, 옷, 구두, 가방 등등에서 나의 취향을 찾았다. 베이커리에 진열된 빵처럼 완제품으로 돈만 주면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호박죽을 좋아하는지 계속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트레이에 담긴 빵을 고르며 그중에 나의 취향이 있고, 그것이 다라고 여기며 살았을지 모른다.



*


얼마 전에 한길문고에서 소설 쓰기 강의가 열렸다. 강사는 10년 동안 소설가로 살아온 최영건 작가다. 그는 남이 뭐라고 하더라도 모난 글을 쓰라고 했다.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하기보다 더 뾰족하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기고, 그러면 계속 작가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최영건 작가는 대형 모니터에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를 쓴 화면을 띄워놓고, 우리에게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소설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소설 쓰기 4강 중 첫 강의여서일까. 기법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쓰려는 이유를 다양한 사례와 작품을 통해서 질문해 왔다.


강의를 듣는 동안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거지?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지? 내가 쓸 수 있는 모난 글은 뭐지?’ 하는 질문을 쏟아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버섯처럼 퐁퐁 솟아나는 걸 느끼다 보니 뜻밖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목요일 저녁 8시, 동네 서점에 앉아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뭘까를 연구하는 일이, 이 시간에 술집이 아닌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소설가의 작은 목소리를 따라 내 마음속을 뒤적여보고 있는 일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5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아직은 아님) 계속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는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은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게 맞다고 하는데, 나만 쓸 수 있는 것이 가치 있다고 하는 글쓰기가 나에게 응원을 보내오는 것 같았다. 계속 나로 살아도 괜찮다는 응원. 글을 쓰고 있으면 나한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이유다.


KakaoTalk_20251022_114412658.jpg 내가 끓인 호박죽
KakaoTalk_20251105_082749217.jpg 한길문고에서 열린 <최영건작가의 소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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