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지 Nov 07. 2019

'82년생 김지영'과 '시크릿 슈퍼스타'

한국 · 인도영화에서 찾아보는 모녀母女의 계보


※이 글은 해당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1. 82년생 김지영.


이 책의 원제는 820401 김지영이었다고 한다. 거짓말 같지만 현실인 김지영의 삶을 나타내는 제목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2년 전쯤, 한창 뜨거운 감자로 논의되던 시기였다. 내게 이 책을 건네준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 엄마. 엄마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냥 평범해~ 동료 직원한테 빌려왔는데 너도 읽으려면 읽어보던지.


그렇게 읽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내 첫 감상도 무던했다. 엄마 말대로 정말 평범한 내용이었으니까.



이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특별할 것 없이 무난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어떤 포인트에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니 이제는 알겠다. 영화를 보러 관에 들어갔을 때 82년생보다는 02년생에 더 가까워보이는 여자아이들 다섯이 나의 오른쪽으로 쪼르륵 횡을 지어 앉아있었다. 그 아이들은 영화 내내 훌쩍이는 울음 소리로 내 오디오를 가득 채웠다. 큰 스크린 앞에서 모두가 하나되어 울고 웃던 연대의 경험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더 극대화될 수 있었다.

어둑한 상영관 속에서도 내 귀와 피부로 선명하게 느껴지던 공감의 분위기와 곳곳에서 흘러나온 소금기 어린 눈물의 속삭임을 어찌 잊으랴.


모든 여성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이 영화는 82년생, 여아낙태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태어난 여자아이 김지영의 삶을 보여준다.


김지영은 결혼한지 몇 년, 이제는 신혼이 아닌 엄연한 기혼이 되었다. 남편과의 애정전선에는 별 문제가 없다. 아이도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시도때도 없이 울긴하지만 크게 아픈 곳 없이 잘 자라주고 있다. 돈 걱정도 없진 않지만 심각하지도 않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추석 명절을 전후로 쌓아두었던 마음의 우울이 터지기 시작하며 김지영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김지영의 엄마 미숙씨는 50년대생이다. 오빠들의 학비를 버느라 교사라는 꿈을 포기하고 일만 해온, 그 시대의 흔한 여성이기도 하다.

삼남매중 막내인 아들을 가장 예뻐하는 아빠. 한약을 지어와도 아들 것만, 해외에 나가 선물을 사도 아들 것만 가장 좋은 것으로. 딸은 얌전히 시집이나 가면 된다는 아빠의 말에 기가 죽어있는 김지영에게 엄마 미숙은 말한다.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마. 나대. 막 나대.
엄마의 바람대로 열심히 나대는 맏딸 은영

예전에 함께 일을 하던 여자 상사가 회사를 새로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영은 문득, 취직하고 싶어졌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일이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세계에서 자신의 필요와 쓸모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아이.


홈페이지에 구인글도 올리고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여가며 지영은 열심히 베이비시터를 구한다. 연락이 오지 않자 남편 대현에게 육아휴직을 부탁하려하지만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복직을 포기하려는 김지영에게 미숙은 자신이 대신 아이를 돌봐줄테니 너는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평생을 희생만 하며 살아온 당신과는 달리 딸인 지영만큼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영에게 빙의한 지영의 외할머니, 미숙의 엄마는 딸 미숙에게 말한다.


미숙아, 그러지 마. 지영이 혼자서도 잘 할거야. 씩씩하게 키웠잖아.


두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삶을 살아.


누군가의 딸이었던 여자 아이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내가 누리지 못한 것, 내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내 딸은  마땅히 누리고 탐내며 살기를.

그렇게 모녀의 이야기는 50년대에서부터 80년대, 그 전후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이으며 계승된다.





2. 시크릿 슈퍼스타 Secret Superstar.


아미르 칸 프로덕션의 전작이었던 <당갈>이 아버지와 딸의 부녀서사를 그렸다면 이번에 개봉한 <시크릿 슈퍼스타>는 단연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줄거리를 아주 짧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트북으로 유튜브에 노래부르는 영상을 올리며 슈퍼스타가 되는 인도 여자아이의 이야기. 당갈에서 주연이었던 아미르칸과 자이라 와심이 이번에도 각자 조주연으로 분했다. 그 조합만으로도 이미 시작부터 흥미로운 영화였다.

왼쪽은 영화 <당갈>, 오른쪽은 영화 <시크릿 슈퍼스타> 포스터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일주일에 네 번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술에 취한 아빠는 화를 못이겨 집안의 물건을 내던지곤 했다. 나보다 연식이 오래되었던 괘종시계도 그렇게 명을 다하고 말았다. 아빠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엄마는 나와 언니를 방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얄팍한 문 너머로는 부모님이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소리,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다 흘러들어왔다.

가장 편안해야할 가정에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폭력성의 존재는 아이로 하여금 가정으로부터 독립을 꿈꾸게 만든다. 시크릿 슈퍼스타의 인시아는 어린 시절의 나를 겹쳐보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이때부터 폭풍 눈물의 조짐이...)


인시아의 엄마인 나즈마와 인시아. 파루크(인시아의 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나란히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인시아라는 이름의 뜻은 Woman, 여자. 한국으로 치면 여아의 이름을 김소녀라고 짓는 셈이다. 인시아의 가족으로는 엄마와 어린 남동생 구두(신발 종류 아니고 이름입니다)가 있다. 허구한날 온갖 트집을 잡아때리는 남편 때문에 인시아의 엄마, 나즈마의 얼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다. 하루는 퇴근한 남편에게 저녁밥을 차려주는데 간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욕을 얻어먹는다. 가죽 벨트를 푸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타서 쓰는 나즈마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줄래도 맘껏 사줄 수가 없다. 그런 그녀가 시집올 적에 혼수로 챙겨온 목걸이를 팔아 인시아에게 노트북을 장만해주었을 때, 나즈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즈마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커다란 세상을 딸인 인시아에게 제공해주고자 했다. 기타와 노래, 노트북과 유튜브가 바로 그것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린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면 인시아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해 나즈마가 생각해낸 묘안은 부르카였다. 오늘날 불평등한 여성 인권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여겨지곤 하는 부르카가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여성을 향한 사회의 핍박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은신처로써 기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절묘하고 날카로운 정곡 찌르기다.


같은 학급의 친구도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인시아에게는 없다. 인시아에게는 노트북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극중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좋은 아빠가 아니야. 아빠는 구두를 예뻐하니까 구두는 놓고 우리 둘이 도망가자."

애원하는 인시아에게 나즈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구두를 두고가면 저 애는 제2의 네 아빠가 될거야."

그에 분한 인시아가 다시 이렇게 소리친다.


우리가 구두를 좋은 남자로 키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꿈을 꾸는 건 기본 권리다. 그러나 기본 권리조차 가지기 힘든 것이 인도의 여성 인권의 실상이다.

나즈마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중인 처지와 자식들의 안위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인시아는 학대받는 엄마가 눈에 밟힌다.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두 모녀에게 서로는 그러나 새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족쇄이기도 하다.


결국 극의 끝에서 인시아와 나즈마는 갈등의 절정을 맞는다. 딸을 위해 이혼 하나 못해주냐며 엄마를 겁쟁이라 치부하는 인시아,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멋대로 추진하더니 딸인 너마저 엄마의 이혼을 멋대로 추진하냐며 화내는 나즈마. 그러나 궁극적으로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에게 서로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둘이기에.

내가 겪었던 아픔을 딸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딸의 미래를 위해서.

엄마는 남편과, 나아가 세상과 싸운다. 딸에게 그런 엄마는 누구보다도 용감한 사람이다.

파루크에게 삿대질하는 나즈마. "너 잘 생각하고 처신해라."

(보는 내내 펑펑 우는 바람에 다음날 아침 눈이 퉁퉁 부었더랩니다..)



ps.

82년생 김지영 속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으시다면 이 블로그를 참고하세요! https://blog.naver.com/cine_play/221693238013

아미르 칸 프로덕션의 레슬링 영화, <당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이 글을 참조하세요! http://m.ize.co.kr/view.html?no=2018062723117281144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영화관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