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 :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
나이가 들어가면 결혼식보다 장례식 갈 일이 더 많아진다. 나의 시간에 비해 부모의 시간이 2배 이상 빨리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며 부모를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처음 장례식에 참석했던 날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대학교 2학년 때쯤이었고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의 어울림은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던 것이었나 회의가 들지만, 그래도 캠퍼스 안에서의 삶을 서로 가장 잘 아는 친구였다.
최대한 어두운 색상의 옷을 골라 입고, 검은색 한복저고리를 입은 친구와 마주 섰다.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어떤 아버지였을지 생각했다. 출장이 잦으셔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더 많으셨고, 그렇게까지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었다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누가 나에게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셔?"라고 묻는다면 난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글쎄... 어떤 분들이시지. 무수히 많은 말들이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낯설고 어색한 자리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위로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것 같아 장례식장 문 앞에서 배웅 나온 친구를 가볍게 안아 토닥였다. 매사 덤덤해서 속내를 잘 알 수 없었던 친구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며 눈에 눈물이 차오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부모를 떠나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물론 그 자리에 내가 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나에게 너무 먼 일이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p.181)
정지아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되는 딸의 이야기이다. 나에게 언제나 아버지의 모습이기만 했던 그에게는 아들로서, 형제로서, 동지로서, 남편으로서, 이웃으로서, 어른으로서의 삶이 존재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의 편린만 부여잡고 그에 대한 애정과 원망 혹은 지긋지긋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었다. 그에게 안녕을 고하러 온 많은 이들의 기억과 사연으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조각들을 찾게 된다.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면서 딸은 비로소 아버지라는 그림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뮤지션 이적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엄마를 부탁해>를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평한 적이 있다.*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 앞에서 모든 자식들은 묻어뒀던 애증과 죄책감이 불쑥 솟구쳐 속수무책이 되곤 한다. 휘몰아치는 일상 덕분에 회한의 눈물과 갱생의 다짐이 금세 내면 깊숙이 가라앉더라도 말이다. 이 책 앞에서 나 역시 그랬다. 나도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말이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 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p.197)
사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이 작품 소개란에 빠짐없이 등장하여 조금 더 진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데올로기 문제는 아주 가벼운 터치로 훑고 지나가고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편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어 부담 없긴 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신념과 투쟁의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시킨 것 같아 좀 아쉽기도 하다.
+ 여담이지만, 일련의 일들로 나는 신경숙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작가 개인에 대한 실망감이 한국 문단 전체에 대한 것으로 이어져 한동안은 한국 소설을 읽지 않기도 했다. 형편없는 글쓰기 윤리 의식을 가진 이가 이렇게 쉽게 복귀하는 현실을 보며 그렇게 큰 파도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구나 싶어 참담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