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이 아닌 서로를 구하는 삶을 꾸리기
출근 후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재난문자 알림이 온다. 그 소리를 들으면 개를 키우기 전보다 확실히 더 불안해진다. 당장 집에 혼자 있는 레몬이부터 떠오르기 때문이다.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소설<딸에 대하여>에 나오는 이 문장은 한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요즘 나의 마음 한 켠에 언제나 불안이 자리 잡고는 도무지 비켜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일테다. 언젠가 악몽을 꿨다. 대홍수로 서울이 거의 잠겼고 별안간 어떤 건물 위로 대피했는데 낯선 개 한 마리가 흠뻑 젖은 채 떨고 있었다. 나는 그 개를 끌어안았고 그제서야 내 개의 행방을 떠올렸지만, 모든 시설이 잠긴 상황에서 나의 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꿈속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 이름 모를 개를 구하는 것처럼, 어디선가 누군가는 나의 개를 구하길.’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5월의 마지막 날 아침, 재난문자 소리가 동네에 빽빽 울려대 잠에서 깼다.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안내에 화들짝 놀라 TV 뉴스를 틀었지만, 북한이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발사했다는 속보 자막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소포장된 사료와 습식 캔, 배변 패드, 우비와 담요, 그리고 스페이스 블랭킷이라고도 불리는 비상용 은박 담요까지 챙겼다. 뭐부터 챙겨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해도 좋을지 따지기 시작하니 가까스로 외면했던 공포가 훅 덮쳐왔다. 이 안락한 공간에서 억지로 뜯겨져 나간 삶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난 4월 28일에는 서울 종로구에 지진이 났다는 재난문자가 오발송되었고, 4월 2일에는 인왕산에서 실제로 산불이 나 축구장 20개 면적이 불에 타는 일도 있었다. 그동안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이 현관문밖에 성큼 가까워져 온 것만 같았다. 몇 년 전에 방영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개와 함께>의 한 에피소드인 ‘어서 와, 제우스’가 떠올랐다. 베를린에 정착한 한 난민이 내전 중인 시리아에 두고 온 반려견 제우스를 독일로 데려오는 과정을 담아낸(결국 성공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재난으로부터 사람이 탈출한 자리에 남은 개를 위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후쿠시마에서도 그랬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재난 상황에서 나의 가족인 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 각자가 방공호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 인간이 개를 반려견이라 부르기 시작한 이래로 사람과 개의 세계가 촘촘히 연결된 듯 보이지만 우리는 과연 각자도생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까?
지금 함께 사는 레몬이는 제주도의 한 쓰레기 더미 마당에서 구조된 믹스견 중 하나다. 레몬이의 구조자들은 입양 홍보를 위해 엔터테인먼트 콘셉트를 차용했고, 그렇게 지구 최초 유기견 아이돌 소속사인 ‘귤엔터테인먼트’가 탄생했다. ‘귤엔터’의 세계관*에서 구조는 길거리 캐스팅, 구조된 강아지들은 아이돌 연습생, 입양은 데뷔 성공이다. 연민과 동정을 걷어낸 명랑한 콘셉트의 홍보는 입소문을 탔고, 차례차례 열일곱의 강아지가 가족을 찾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레몬, 작년 7월에 우리 집에서 임시 보호하기 시작해 11월에 가족이 됐다. 입양을 고민하는 데 4개월이 걸린 셈이다. 인생의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핑계로, 삶에서 그 무엇도 확정 짓기 어려워했던 나였다. 고작 일인분의 평온한 일상을 구축하는 데에도 이런저런 부침이 있는데, 또 다른 생명을 책임지는 과정에서 딸려 올 크고 작은 사건들의 규모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개의 전 생애에 걸쳐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막중함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데뷔에 성공한 열일곱의 ‘귤가족’이 모인 단체 채팅방이 있다. 다양한 정보들이 오가기도 하고, 사정이 있을 때 잠시 강아지 돌봄을 다른 가족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레몬을 입양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이 공동체의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와 함께하는 그 모든 과정 속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을 거란 확신, 그것은 또렷한 연대감이었다. 악몽 속에서조차 누군가는 내 강아지를 구했으리라 믿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나의 행동과 변화가 일으키는 파장이 다른 이의 세계와 긍정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 필요를 점차 느꼈다. 두려움을 향해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고, 일상을 점령한 기후 재난 상황에서 개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귤멍멍이 보호자들의 모임’을 제안했고, 한 달에 한 번 각자 관심 있는 주제를 조사하고 발표하는 온라인 포럼의 형태로 진행 중이다. 극한 날씨와 극한 산책에 대해, 도시공원 정책과 반려견 운동장 실태에 대해, 개와 함께 이동한다는 것과 탄소 배출에 대해, 합법적으로 음식물쓰레기를 먹는 개 농장의 개들에 대해 토의하며 개인의 실천과 구조적 해법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적어도 이 조그마한 모임이 각자도생으로부터 조금씩 달음질하려는 시도임은 확실하다.
폭우와 폭염을 주의하라는 재난문자가 번갈아 울리는 것이 일상이 된 지금, 개를 비롯한 모든 비인간 존재가 겪는 전대미문의 기후에 대해 생각한다. 재난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그 영향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가르지 않고, 개인과 집단을 구분하지 않은 채 상처를 남길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살아남을 권리가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계는 언제쯤 올까. 결국 나의 생존배낭에 어떤 도구를 챙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존재한다는 더 큰 감각이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모두가 모두의 안녕에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지금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새근새근 평온하게 잠든 레몬을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간이다. 내가 너를 살릴게, 같은 거창한 사명감보다도 여기서 어떻게 함께 생존할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 나의 작은 개 레몬으로부터 시작된 이 연결감은 귤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번져가고, 다른 존재의 평온한 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개와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로 뻗어나가는 연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기의 시대를 살아갈 힘을 키우는 ‘생존 필수 조건’이 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 수 있다.
*귤엔터테인먼트가 궁금하다면 동그람이북스에서 출간한 <우리는 귤멍멍이 유기견 아이돌>을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이 글은 페이퍼 여름호'vol.267 너와 나의 생존배낭'에 '함께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