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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Aug 20. 2021

가끔은 제주여행

제주도 둘






왠일인지 아침 일찍 눈을 떠졌다. 하루 전 생리를 시작해서 아직 무거운 생리통이 아랫배를 공격 중이다. 오늘의 일정은 그대로 내일로 미뤘다. 샤워를 하고, 어제 만들어 놓은 설거지 거리를 해놓았다. 간단히 방도 치우고...

누워서 핸드폰 게임을 좀 하다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두시쯤 되었을까, 남자친구가 이마를 톡톡 건드려 깨웠다.


"나 근처 카페 가려고. 같이 안 갈 거지..? 일어나면 연락해, 물이랑 초콜릿 여기 있어."


어제 말다툼을 했다. 그전날 밤에 같이 산책 나가기로 해놓고서 그가 잠들어버려서 깨워도 일어나지 않은 게 그 이유였다. 또다시 간단한 공감의 부재를 이유로, 투정은 말다툼으로 바뀌어, 나는 독불장군처럼 '이제부터 너도 나 깨우지 마. 만약 일어나서 아침 같이 먹고 싶으면 너 혼자 먹어. 일찍 나가고 싶으면 너 혼자 나가 놀아.'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기는 나만큼이나 하는 남자친구는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자존심 부리기는 오늘까지 이어져 그는 눈치를 보면서도 나를 깨워 함께 나가자고 말 할수 없는 것이었다.

내 자존심도 무거운 생리통을 고백하며 오늘 하루 같이 쉬며 내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결에도 한껏 신경 안 쓰는 척 응, 하고 뒤로 누워 버렸다. 잠시 후,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일어나 다시 샤워를 했다.


숙소 근처에는 걸어서 갈 만한 곳은 없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길을 따라 나가면 금방이지만, 생리 중에 자전거 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기에 나는 오늘 그냥 숙소에 머무르기로 했다.


공부를 하고 글도 쓸 겸, 나는 노트북, 커피, 아이스크림 컵으로 만든 재떨이와 담배를 챙겨 숙소 정원의 평상에 앉았다. 햇빛과 그늘이 겹쳐 왔다갔다 나를 비춘다.


숙소에서 키우는 강아지 몇 마리가 주위를 맴돈다. 어린 진돗개들은 어떨 때 보면 묶여 있고 어떨 때는 목줄이 풀려 돌아다닌다. 신기하게도 사람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가까이 다가오지만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아 좋다. 사람을 자기 방석이나 터그 장난감쯤으로 보는 우리 집 개들이랑은 다르게 올바른 예의범절을 갖추었다.


이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졸졸이(졸졸 따라다니는 애)가 다가와 평상 옆에 벗어둔 내 쪼리를 하나 물어간다.


"안돼! 가져와."


신기하게 알아듣는 듯, 눈치를 보며 쪼리를 물었다 내려놓았다 하며 내 주위에 다가와 맴돌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가 뺏어가지 않으니 그대로 물고 쫑쫑 달려갔다. 알아는 들어도 도로 내놓기는 싫었던 거지. 자기 친구 낑낑이(낑낑 우는 애)에게 가져가 함께 내 쪼리를 뜯으며 논다.


물어뜯을 것 천지인 시골집에서 하필이면 내 쪼리를 가져가다니. 나는 왜인지 쉽게 포기할 마음이 들어서,  커피를 마시며 내 쪼리가 어리지만 날카로운 개들의 이빨에 뜯겨 사라지는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이런...

잠시 쪼리와 함께한 추억이 스쳐지나간다. 작년인가 재작년 부산 여행. 한참 살았던 홍대 자취방에서의 기억, 비가 올 때면 항상 선택받던 아이... 제주에서의 마무리까지. 너의 삶이 화려했구나. 잘가라.


제주 시골집의 정원과 밭의 풀들은 초록색으로 익다 못해 푸르다. 근데 개중 진짜로 푸른 색 풀들도 있다. 가지는 열매의 빛깔처럼 잎과 줄기에 보랏빛이 돈다. 주인분께서 밭에 있는 야채 실컷 따다 먹으라 하셔서 매 끼니 식탁에 각종 친환경 야채가 넘쳐난다.


햇빛 쬐며 공부도 좀 하고 늘어져 친구와 전화해 수다도 한참 떨고 나니 남자친구가 왔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개들과 한참 놀아주고 내 맞은편에 슬쩍 앉아 자리를 잡는다. 한참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누다, 빨래를 돌려 햇살 아래 빨래도 널었다. 모기 물린 발목과 모기향 불 붙이다 데인 손가락을 슬쩍 보더니, 밭에 가서 감자를 캐다가 천연 감자밴드를 만들어 붙여준다. 재밌다. 우리의 싸움은 이렇게 슬쩍 또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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