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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 Mar 26. 2023

필라테스와 아프리카의 상관관계 (2)

    그래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엉덩이를 스쳐가 납작해진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이 도시의 붉은 해가 저무는 것을 감상하면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켓을 꼭 쥐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우리는 필요에 의해 만난 관계가 주는 냉정한 인상을 피하기 위해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그런 얘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나는 또 삶과 사랑, 사람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 없이 입에 올렸다.


    동네를 온종일 걸어 다녀도 너무 심심했어. 그리고 빵도 맛이 없어. 그리고 거기는 백두산만큼이나 고도가 높아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거 있지.


    소재가 고갈나버린 나는 결국 지난 6개월 동안 나를 안달 나게 했던 나라에 대해서 떠들고 말았다. 피한다 했는데도 한 마디 한 마디에 심통이 섞인 것 같아서, 그리고 혼자서만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나는 별안간 입을 꾹 닫았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시 흐르는 정적 속에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경적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붉은 벽에 드리우는 섬광이 예뻐서 언제까지 말없이 이걸 보고만 있어도 될까 생각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번엔 H가 입을 열었다.


    우린 주말이면 바다에 가. 그리고 친구들이랑 같이 weed를 펴.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는 또 입꼬리가 귀에 닿을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건 자연과 가까운 그런 얼굴이었다. 삶의 고난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얼굴. 어떻게 하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마음이 조금 꿈틀거렸다. "너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바보 같은 질문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하게 샘이 났다. 바다 옆에 사니까 그런 거야. 아니면 weed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면 날씨가 따뜻하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그는 자신의 얘기에 한참을 열중했다. 술과 휴식, 학교와 사랑, 꿈과 바다에 대해서. 그러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 표정을 짓기 위해 필요한 안면 근육에 대해 열심히 골몰했다. 그의 삶과 나의 삶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졌고, 난 그 이유를 알아야만 오늘 밤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I don’t take it for granted. 

    나는 이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


     나는 한동안 까마득해졌다.. 그 표정. 그 얼굴. 그건 언어마다 사용하는 안면 근육이 달라서도 아니었고, 그가 대마를 피우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전날까지 내가 알던 H란 바다가 가까운 도시에 사는 특권을 가진 사람, 자유롭고 쾌활하고 낙천적이고, 어떤 고난이란 것이 없을 것 같은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날 이후 내가 알게 된 그의 모습이란 진중하고 열정적이고, 관대하면서도 겸손한, 주어진 일분일초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삶에 감사하는 사람의 표정은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나기 마련이란 것을 나는 그날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건 한국을 떠나왔던 내가 아프리카를 누비며 찾아 헤매던 것, 돌아갔을 때쯤 내 것이길 바랐던 그런 얼굴이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라곤 진해진 주근깨밖에 없는 게 확실했고, 서울에서 도망쳐 온 이 사람은 다시 서울로 또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고 재빨리 두 손 모아 기도했다. 하느님 제가 귀국을 좀 미룰 수 있을까요? 기간은 일주일.. 아니 한 달.. 사실 영원히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H는 내게 다시 이곳에 올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고 나는 웃으며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밤이 저물고 있었다.

.

.

.

    한국에 돌아온 나는 떡볶이와 빙수가 주는 환락에 빠져 사느라 그런 다짐 같은 건 금세 잊고 살았다. 이 고운 입자의 얼음이란 전 세계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것임을 실감하면서. 빅토리아 폭포의 시원한 물방울, 촛불이 일렁이는 지독한 어둠, 짭짤한 모래사장 같은 건 서서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가끔 맥주나 음악에 빠져 밤을 새우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에 걸맞은 하루를 보내는데 총력을 다했다. 시간이 흘러 아량 넓은 한 방송국에서 주근깨가 연해진 나를 채용해 주었고 덕분에 나는 할인 행사를 하지 않는 필라테스 센터에도 계속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느샌가부터 꿈꾸던 그 얼굴과 가까워졌는지 멀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가는 듯했다.


    척추를 하나하나 분절하면서 내려가세요.


    문득 거울 속 다리를 허공에 들고 우스꽝스럽게 복근을 단련하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몸이 떨리고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 빼면 차 안에서 봤던 누군가의 반가운 표정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과격한 신체 활동에 의한 아드레날린일 가능성이 높기야 하겠지만 짜릿한 전율 같은 게  머리끝부터 발끝을 타고 흘렀고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맙고요. 감사해요.' 그것도 잠시 나는 곧이어 복근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고 다시 바라본 거울 속엔 그저 진이 빠진 채로 넋이 나가 있는 한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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