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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Apr 19. 2022

창작 시간과 균형의 경계


    혼자 살기 시작한 무렵부터 가끔 가다 번역, 원고료가 들어오거나 연주 의뢰가 들어와서 입에 풀칠을 좀 할 수 있게 되면 습관처럼 채워두는 물건이 있었다. 바로 오렌지 주스였다. 주로 물 또는 탄산수로 수분을 섭취해 온 습관 덕분에 그 외 음료는 잘 구매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주머니가 조금은 두둑할 때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샛노란 오렌지 주스 한 통을 샀다. 생활비는 오르락내리락하며 늘 불안정했으나 가끔가다 상승세를 탈 때가 있다. 수준이 비교적 조금 높아질 때는 큰 오렌지 주스 두 통이 어김없이 채워져 있었다. 바라만 봐도 새콤달콤함이 느껴지는, 일종의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조그마한 보상과도 같았달까.



    나에게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일은 질적 예술을 행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과도 이어지는 중요한 문제로 이어진다. 결과에 대한 긍정성보다는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 즉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는 예술인들을 향한 가르침은 그동안의 작업을 몰아치듯이 해내 온 나를 다그치는 말과도 같았다. 중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행해옴에도 불구하고 생활을 위해서는 늘 일회성 작업을 주로 맡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창작 작업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 활동하지 못해 근황을 알 수 없었던 동료 예술인들의 얼굴이 드문 드문 SNS에 보이기 시작하고, 방역 정책 또한 풀릴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서서히 페스티벌과 공연장도 다시 열리며 여기저기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마지막 무대에 섰던 때는 작년 12월, 문예회관 문학예술교육의 사업에서 초청받은 재즈 공연이었다. 이마저도 관객들은 마스크를 쓰고 앞, 뒤, 양 옆 세 자리 이상을 띄어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무대에서 바라본 관객석은 썰렁했다. 실제 공연 관람을 사전 신청한 관객들의 수는 공연을 세 번 꽉 채우고도 남을 수였지만, 실제 코로나 대비 방침으로 인하여 1/3로 제한되거였다. 문화예술을 누릴 자유를 명확한 기준 없이 제한하고 또 억압해온 지난날들의 잔혹한 현실을 실감했던 무대였다. 이처럼 긴 시간 동안 현실 속을 살아온 우리다.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과 싸워야 할 현실 그리고 따라가야 할 현실은 전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해도 비추지 않고 지나간 단비에 오랜만에 땅이 젖었던 그런 수많은 날들 속 유난히 피하고 싶은 현실에 비춘 하루들.



    지난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작인 <코로나 시대의 한국 재즈신> 르포집을 마감한 후 나는 다시 글과 생활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부터 기업에 입사해 글을 쓰고 기획을 맡아 일했는데 (글보다는 사람과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지만), 기업에서 요구하는 평생 내러티브 관점으로 생각을 풀어내고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일을 해온 나에게 개조식으로 쓰는 글은 새삼 쉽지 않았다. 단적으로는 재미있기도 했고,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은 일이고, 성장을 도모하는 태도로 임했지만 노동비로 받는 즉 월급은 내 기준 적당한 수준은 아니었다. 생활 공과금, 월세, 작업실 유지비, 인력비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처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뮤지션이자 작가로 살며 창작 시간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일을 맡으면 그 무엇보다 진지한 프로다운 태도로 임함에도, 일과 삶을 균형 있게 나 스스로 일구어 가는 일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습관을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든 부분은 창작 작업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잠을 충분히 자고 다른 사람의 삶을 돌보는, 생활 자체를 일구어 낼 수 있는가 하는-무엇보다 자기 확신을 필요로 하는-지금 내가 무엇보다 난관에 부딪힌 류의 일들이었다. 삶과 프로젝트의 조화는 불가능하고, 그러한 조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열정 넘치는 수전 손택의 말이 올해 내게 씌워진 것만 같다. 거부할 수 없는 그녀의 철학. 



    이처럼 출판은 했지만 이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수많은 작가들은 강연, 입주 작가, 특별 연구원 등 다른 임시직을 떠돌며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창작생활을 얼마나 균형감 또는 리듬감 있게 유지할 수 있느냐가 아마도 삶의 최대의 난관이지 않을까.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나름의 노력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살아나간다. 가정이 있다면 부양가족의 욕구와 자신의 야망 사이에서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할 것이고, 창의적 작업과 가정의 의무 및 생계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기관에서 일을 하거나, 온종일 녹음, 작사 등의 음악을 창작하는 하는 외주를 맡을 때는 글을 쓰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었다. 일상을 주로 기록하는, 비교적 힘이 빠진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시간이 없어 불가능했던 날도 많았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글쓰기와 삶이 뒤섞이기를 바란다.
내 책이나 글쓰기 자체가 내가 하는 일과 완전히 동떨어지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글은 하루하루의 내 생각과 다를 게 없어야 한다.
-실라 헤티 Sheila Heti


    이런저런 일들을 하지만, 무엇보다 하루를 정리하는 글을 쓸 때가 가장 내면적으로 평화롭다. 혼자 조용히 글을 쓸 때는 종종 아녜스의 작업 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그녀는 예술가들이 늘 찬양하는 영감과 뮤즈를 믿지 않았다. 2020년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에서 만났던 바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속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글을 바라보고 작업하는 태도는 창작에 소요되는 건 창의적 힘과의 관계이고, 자유 연상 및 공상과 공조하고, 우연한 만남과 사물, 추억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의 철학과 일정 닮아있다. 그녀처럼 내 몸에 익힌 성찰과 수양을 글에 비춰내려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뜻밖의 순간과 우연성이 조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쓰는 것이다.



    작업 환경이 열악할 때도, 프로젝트에 빠져있지 않은 상태로 글을 마주하고 온몸으로 써야 할 때도, 구상하는 책을 실제로 펜을 들고 쓸 수 있을 때까지 일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해도,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삶만을 생각하는 것이 사명이란 생각을 하며 하루를 산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난 세기 존재했던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코스프레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고독한 마음에 위로가 깃드는 것 같다. 조앤 미첼의 나의 취약점을 드러내지 않고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뭔가를 느낄 수 있다는 말처럼, 내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불안과 불행의 시간을 겹으로 겪고 나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희망을 모색하게 된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불어오는 살짝 더운 봄내음이 나쁘지만은 않다. 이 정도의 긍정성을 품고 있는 마음이라면, 뭐든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대로, 쉼이 부족하다면 조금은 느린 속도로 살아내면 되니까. 언젠간 다시 냉장고를 오렌지 주스로 꽉 채울 날이 오겠거니, 새콤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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