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메이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아버지
‘태초에 맥주가 있었다.’ 이 명제를 ‘태초에 미국 크래프트 맥주가 있었다’로 바꾸면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태초라고 하면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겨난 아주 오래된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미국의 맥주 생태계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처음 생겨난 태초라 하면 고작 반세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프리츠 메이텍(Fritz Maytag)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메이택은 미국에 마이크로 브루잉 즉 크래프트 맥주가 없던 시절 처음으로 크래프트 맥주를 만든 인물입니다. 메이택이 있었기에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도 브루클린 브루어리도 생겨난 것입니다.
일본과 영국에서 잠시 살기도 했던 자유주의자 메이택이 히피 운동의 진원지인 자유도시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은 건 맥주를 좋아하는 팬들에겐 행운입니다. 메이택이 원래부터 소규모 양조에 통찰력을 발휘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밤이 되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맥주를 즐기는 부잣집 도련님일 뿐이었습니다. 메이택은 샌프란시스코의 올드 스파케티 팩토리라는 오래된 장소에서 자주 놀곤 했는데, 그곳이 영국의 동네처럼 편했다고 합니다. 메이택은 밤이면 친구들을 만나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돌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 프레드라는 친구가 앵커 양조장에 가 본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프레드는 앵커 양조장이 다음 주면 문을 닫을 것 같은데, 메이택이 가보면 분명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앵커 양조장은 당시 메이택이 돈을 빌려 주거나 양조장을 인수하기를 바랐습니다. 메이택이 앵커 양조장을 방문했을 때 양조장을 사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미 그는 양조장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다음 날 서둘러 양조장을 인수해 버렸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양조장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메이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메이택을 동네의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그는 메이택 세탁기로 유명한 메이택 가전 회사의 상속인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프레데릭 루이 프리츠 메이택 3세, 아버지는 메이택 2세, 증조할아버지가 메이택을 설립한 메이택 1세입니다. 뼈대 있는 집안과 돈 많은 집안이라는 뜻입니다. 메이택 가전 회사는 현재 월풀에 인수되었지만, 여전히 직원 2,500여 명이 근무하고 한해 5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큰 기업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자칫 돈 많은 백수가 취미로 맥주를 만들었나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소규모 양조에 열정을 다했고, 싸구려 맥주 시장에서 고급 맥주의 차별화를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 없이 일했습니다.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생산된 맥주는 자주 오염되었고, 맥주를 팔기 위한 판로는 험했으며, 가지고 있는 자산도 떨어져 대출받기도 했습니다. 메이택이 쉽게 포기했더라면 현재의 크래프트 맥주는 없었을 겁니다. 아니 한참은 늦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후대의 양조가들이 영감을 받고 크래프트 맥주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메이택은 1965년 그의 나이 28살에 앵커의 지분 51%를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나머지 지분을 모두 사들였습니다. 앵커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쉬 시절부터 샌프란시스코에 뿌리를 내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입니다. 메이택이 앵커를 인수한 초기의 양조장 규모는 아주 작았습니다. 한 번에 55배럴 정도 양조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양조했다고 하니, 1년에 고작 1,000배럴 정도의 맥주를 생산하는 작은 양조장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전부 팔지를 못했습니다. 판매하기 전에 시큼하게 변해버려 항상 판매할 수 있는 양보다 많은 양을 양조했다고 합니다. 앵커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이었습니다.
앵커는 10년쯤 지나 초기보다 10배 이상을 생산하는 규모의 양조장이 되었습니다. 앵커의 맥주가 인기를 끌자, 생산량 부족의 문제에 직면하였고 어쩔 수 없이 양조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메이택은 크래프트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메이택은 자본을 늘리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품질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메이택은 ‘크기가 품질의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양조장 이전에 큰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메이택이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해도 무한히 들어가는 비용은 어쩔 수가 없었나 봅니다. 가능한 모든 돈을 빌렸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가진 모든 것을 담보로 잡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이자율이 20%대였다고 하는데, 메이택의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에서 텐트를 치고 잘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의 고정된 선입견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이택의 상속자여서 별 어려움 없이 해냈을 거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가진 모든 것을 모두 걸을 수밖에 없었던 사업이었던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 결국은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전성기를 이끈 신념에 박수를 보냅니다.
메이택이 앵커에 투자했을 때 미국에는 50여 개의 지역 양조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앤하이저-부쉬나 밀러와 같은 대기업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맥주 대기업은 규모 면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량으로 재료를 구입하여 남들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다거나 유통 채널을 이용하여 미국 전역에 널리 맥주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케팅에 큰 돈을 들여 TV나 라디오로 지역의 맥주보다 대기업의 맥주가 낫다는 식으로 광고하고 있었습니다. 앵커와 같은 소규모 양조장은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은 버드와이저나 쿠어스 같은 국산 맥주를 마시거나 하이네켄이나 벡스 같은 유럽에서 수입된 맥주를 마셨습니다. 간혹 풍미가 있는 맥주도 수입되고 있었지만 대부분 옥수수와 쌀이 첨가된 싱겁고 풍미가 약한 부가물 라거를 마셨습니다. 이런 싱거운 라거의 한복판에서 메이택이 선택한 맥주는 풍미가 풍부한 올몰트 맥주였습니다. 메이택은 앵커의 오리지널 맥주인 스팀 비어의 레시피와 양조 과정을 손봐 다시 내놓기로 생각했습니다.
메이택은 당시 미국의 거의 모든 맥주가 순하고 가벼운 라거였기 때문에 풍미가 진한 맥주가 차지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가령 시간대마다 어울리는 맥주도 다를 것이며, 맥주를 그저 청량하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씹듯이 음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물론 기네스 스타우트 같은 맥주도 있었지만, 국산 맥주 중에는 이런 맥주가 없었습니다. 당시 앵커가 올몰트의 진한 풍미를 내는 맥주를 생산하는 유일한 양조장이었습니다. 메이택의 예상대로 스팀 비어에 반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웃에 사는 찰스라는 인물입니다. 찰스는 Brooklyn Bowl이라는 레스토랑의 소유자였는데,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스팀 비어를 마셨고, 맥주의 풍미가 풍부하고 색달라서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평생 크래프트 맥주의 옹호자가 되었고, 그의 레스토랑에서는 크래프트 맥주만 취급했다고 합니다.
메이택은 동료 양조가들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메이택은 신생 양조가들과 경쟁하기보다 그들에게 양조 기술을 전수하고 크래프트 맥주의 규모를 키우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메이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서부의 켄 그로스만과 동부의 스티브 힌디입니다.
그로스만은 캘리포니아 치코 지방에서 작은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로스만은 그대로 눌러앉아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 인생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 홈 브루잉 재료와 장비를 파는 가게로 전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운명적으로 메이택을 만나 영감을 얻고 맥주 양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로스만은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와인 및 맥주 무역 박람회에서 메이택을 만났습니다. 이때 메이택은 앵커 브루어리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로스만은 메이택과 여러 세대를 거쳐 양조장을 운영해 온 선배 양조가들과 어울리면서 양조장을 차리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1980년,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에라 네바다는 현재 직원 수가 천 명이 넘고 연간 백만 배럴이 넘게 맥주를 생산하는 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로스만은 크래프트 맥주만 팔아 조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메이택과 함께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후대의 양조가들의 꿈이자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미국 동부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맥주 양조장이 있습니다. 이 양조장은 영문자 B를 형상화한 ‘BROOKLYN BREWERY’ 로고가 인상적입니다(이 로고는 ‘I❤NY’을 만든 밀톤 글레이저의 작품입니다). 이곳의 창업자 스티브 힌디도 메이택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힌디는 6년간 AP 통신의 특파원으로 중동에서 근무하면서 동료가 몰래 홈 브루잉하면서 맥주를 마시는 걸 지켜봤습니다. 중동에서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힌디는 미국 서해안에서 시작한 마이크로 브루어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힌디는 마이크로 브루잉의 사업적 가능성에 보게 됩니다. 힌디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인 톰 포터를 설득하여 1988년에 본격적으로 브루어리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힌디는 선배들의 양조 경험과 당시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힌디가 지은 ‘The Craft Beer Revolution’입니다. 브루클린은 많은 강연과 교육 활동으로도 유명합니다. 맥주에 관한 많은 저작과 강연 활동을 하는 ‘가렛 올리버’가 브루클린의 브루마스터입니다.
2022년 BA(brewersassociation.org)에 등록된 정보에 의하면, 연간 15,000 배럴 이하를 생산하는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2,035개, 연간 6백만 배럴 이하로 생산하는 지역 브루어리가 261개 입니다. 연간 6백만 배럴 이상을 생산하면 라지(Large) 브루어리로 분류되는데, 그 수는 79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메이택이 앵커 브루어리를 인수할 당시에는 오직 한 개의 마이크로 브루어리와 182개의 일반 브루어리가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마이크로 브루어리는 조금 늘어 18개였고, 반대로 일반 브루어리는 크게 줄어 76개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반 브루어리는 줄어든 반면 크래프트 브루어리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에 탭룸이나 브루펍을 포함하면 만 개에 근접합니다. 이 모든 것의 태초에 메이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내세울 만한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이 대기업에 매각되면서, ‘크래프트’라는 고유의 타이틀을 잃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크래프트 브루어리라고 하면, 대기업을 포함한 외부 자본이 25%를 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AB 인베브에 매각된 구스 아일랜드, 하이네켄에 매각된 라구니타스, 콘스텔레이션 브랜드에 매각된 발라스트 포인트입니다. 참고로 브루클린도 기린에 일부 지분을 매각했지만 25%를 넘지 않아(24.5%) 크래프트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매각 금액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2015년 콘스텔레이션 브랜드가 발라스트 포인트를 인수한 가격은 10억 달러, 하이네켄이 라구니타스의 지분 50%를 인수한 가격은 5억 달러입니다. 메이택이 미국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을 시작했을 때, 크래프트 맥주를 팔아 조만 장자가 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한편, 앵커 브루잉도 2017년 일본의 삿포로 홀딩스에 8,500만 달러의 가격에 매각되었습니다. 직전 앵커의 한 해 매출이 3,500만 달러라고 하니 한 해 매출의 2.5배 정도에 매각된 셈이지만, 다른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의 매각에 비하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메이택은 이미 2010년에 앵커를 팔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메이택이 꿈꾸던 크래프트 양조장의 이상은 대기업에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크기가 품질의 적’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메이택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제가 미국 크래프트 맥주에 관한 기사를 쓰려고 한 이유는 마트에서 브루클린 라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야~ 브루클린의 맥주를 마트에서 다 보네’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한때 그러니까 2010년대 초중반쯤일 겁니다. 당시 대형마트에 수입 맥주가 황금기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유명 트라피스트 맥주라든가 미국의 ‘홉 레이싱’ IPA나 ‘황제’ 타이틀을 단 스타우트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팔리지 않았던지 이런 맥주들은 이제 바틀샵이 아니면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대기업의 힘을 얻은 일부 크래프트 맥주들은 유통의 힘으로 마트와 편의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무엘 아담스(보스턴 비어는 크래프트 맥주의 대기업), 구스 아일랜드(AB인베브 소유), 라구니타스(하이네켄 소유), 빅웨이브(코나 브루잉) 등입니다. 이러한 맥주들은 꾸준히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브루클린 라거를 마트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브루클린은 제게 조금 특별합니다. 스티브 힌디가 쓴 ‘The Craft Beer Revolution’을 감명깊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브루클린의 맥주에 더욱 반가운 기분이 들었고, 바로 기사 작성에 욕심을 냈습니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즐길 수 있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라는 주제로 쓰려고 했지만, 보면 볼수록 크래프트 맥주의 시대를 연 프리츠 메이택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크래프트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가 포기하지 않고 길을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어처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크래프트 길을 낸 불도저이자 굴착기였고, 우리는 지금 그가 닦은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개척한 길은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크래프트 맥주의 팬이라면 메이택을 한 번쯤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