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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Jun 07. 2023

비텔스바흐 가문의 맥주이야기 (1)

1516년의 맥주순수령이 독일 최초의 맥주식품법이 아니라고?



유럽에는 오랫동안 왕국이나 공작령을 통치한 명문 가문이 있습니다. 맥주로 유명한 독일에도 명문 가문이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1세와 카를 5세 등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명문 가문으로, 600년간 오스트리아를 지배했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독일의 변방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신하로 지내다가 19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을 누르고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왕국의 가문입니다. 독일의 북부에 호엔촐레른 가문이 있다면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 지방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이 있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중세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명문 가문입니다. 하지만 가문 내의 잦은 영토 분쟁으로 가문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고 결국에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때 독일 제국에 흡수되었습니다. 비록 바이에른의 영토는 독일 제국에 흡수되었지만 바이에른의 맥주순수령만큼은 독일 맥주를 통일했습니다. 현대까지 이어진 맥주순수령과 독일 맥주의 전통을 지켜낸 가문이 바로 비텔스바흐 가문입니다.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의 실질적인 시작은 12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에게 충성을 다한 오토 1세로부터 시작합니다. 오토는 황제와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하면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황제는 이런 오토를 바이에른 공작에 봉하면서 바에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역사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역사입니다. 오토 1세로부터 대를 이어 70년간 이어진 바이에른은 그의 손자인 오토 2세 사후에 상바이에른과 하바이에른으로 쪼개집니다. 14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루드비히 4세 때 잠시 통합을 이루지만 그의 사후 다시 4개의 공작령으로 나뉩니다. 그 4개의 공작령의 이름은 바이에른-잉골슈타트, 바이에른-란츠후트, 바이에른-뮌헨, 바이에른-슈트라우빙입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이 시행한 첫번째 맥주 양조법은 이 시기에 시작됩니다. 바로 독일의 맥주순수령 라인하이츠게봇(Reinheitsgebot)입니다.


독일의 맥주순수령은 가장 오래동안 유지한 맥주식품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흔히 독일의 맥주순수령은 1516년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4세가 최초로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독일 최초의 맥주 식품법은 아닙니다. 그보다 대략 70년 전 인 1447년, 바이에른 공작령 중의 하나인 바이에른-뮌헨은 맥주의 재료에 보리, 홉, 물 만을 사용하는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중인 맥주식품법 중의 하나입니다. 1487년이 되면 바이에른-뮌헨의 공작인 알브레히트 4세는 그의 공작령에서 이 법을 따를 것을 강제화합니다. 한편 또 다른 바이에른의 공작인 바이에른-란츠후트의 게오르크는 바이에른-뮌헨의 순수령보다 더 광범위하면서 디테일한 법령을 제정합니다. 게오르크는 맥주의 재료에 보리 뿐만 아니라 밀의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게다가 맥주 뿐만 아니라 와인과 미드 그리고 맥주의 재료, 품질, 가격, 세금까지도 법령에 포함시켰습니다. 심지어 이 법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양조자의 신체에 체벌을 가하거나 맥주를 버리게 하는 것까지도요.


4개의 공작령으로 쪼개져 있던 바이에른은 각 공국의 상속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통합을 맞게 됩니다. 먼저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작이 후계자 없이 죽자 나머지 세 공국이 영토를 나눠 가졌습니다. 바이에른-잉골슈타트는 바이에른-란츠후트에 흡수되었고, 15세기 중반이 되면 바이에른-란츠후트와 바이에른-뮌헨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이에른-란츠후트의 공작이 상속자 없이 죽자 란츠후트 계승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틈에 바이에른-뮌헨의 알브레히트 4세가 바이에른 지역의 4개의 공국을 모두 통일합니다. 이때 각 공작령마다 다르게 운영되고 있던 맥주수순령도 하나로 통일됩니다. 이 통일된 법령이 바로 1516년에 빌헬름 4세가 반포한 맥주순수령입니다. 

15세기 중반 바이에른은 4개의 공작령으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1508년 바이에른을 통일한 알브레히트 4세가 죽고 그의 유산을 물려 받은 것은 장남인 빌헬름 4세입니다. 계승 과정이 그렇게 매끄럽지는 않았습니다. 알브헤히트 4세는 장남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었지만 동생 루드비히는 형이 모든 재산을 상속하는 것에 거세가 반발했습니다. 빌헬름 4세는 동생의 압박에 굴복하고 동생에게 바이에른-란츠후트와 바이에른-스트라우빙을 떼어주고 공동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상속자 없이 죽자 공작의 영지는 모두 빌헬름 4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빌헬름 4세는 정치적으로는 공작의 영지를 모두 물려 받았고 문화적으로는 맥주순수령의 모든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빌헬름 4세는 바이에른-뮌헨의 맥주순수령과 바이에른-란츠후트의 맥주순수령을 비교하여 비교적 더 단순했던 뮌헨의 법령을 채택하고 맥주의 재료에는 오직 보리, 홉, 물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맥주순수령을 1516년 4월 23일에 잉골슈타트에서 반포했습니다(사실은 빌헬름 4세와 그의 동생 루드비히가 함께 법안을 작성하고 서명했습니다). 이것을 통일된 바이에른 전역에 강력하게 적용하였는데, 그 외의 독일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유롭게 양조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맥주 전통은 바로 바이에른의 맥주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6년,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4세는 맥주순수령을 반포했습니다


그런데 맥주순수령으로 맥주의 재료를 제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맥주의 생산에 사용한 재료를 보호하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맥주의 곡물로 보리만 허용한 이유는 빵은 만드는데 필요한 밀을 아끼고 보리와 밀의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홉은 맥주의 풍미와 쓴맛을 내고 박테리아로부터 맥주를 보호하여 보존기간을 늘립니다. 홉 대신 그루트를 사용하면 맥주의 맛을 향상시킬 수도 있으나, 잘못된 그루트를 사용하여 역겨움을 주거나 환각성이나 독성, 중독성이 있는 맥주를 생산할 수도 있습니다. 물은 대체할 수 있는 액체가 없습니다. 물은 끓이고 소독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한 재료입니다. 요약하자면 맥주순수령의 목적은 맥주 생산에 쓰이는 재료로부터 빵의 생산을 보호하고, 유독한 재료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맥주 가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맥주 재료에 대한 세금과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맥주순수령 450주년을 기념하는 1983년의 우표


빌헬름 4세는 1550년 5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유산은 그대로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물려 받았습니다. 알브레히트 5세는 어릴 적 잉골슈타트에서 가톨릭 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알브레히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으로 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이것은 훗날 30년 전쟁 시 같은 가톨릭으로 황제의 편에 서게 되는 기반이 됩니다. 알브레히트는 문화적으로는 아버지가 제정한 맥주 식품법을 한층 강화시켰습니다. 우선 즉위한 후 바로 맥주순수령을 개정해 그동안 맥주의 재료에 빠져있던 효모를 법령에 추가했습니다. 독일에 맥주에 관한 법령이 맥주순수령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알브레히트는 1553년 맥주를 양조할 수 있는 시기를 법령으로 지정했습니다. 


냉동 시설이 없는 시절, 여름에 양조할 경우 맥주가 쉽게 상할 수 있기 때문에 알브레히트는 맥주의 양조를 가을에서부터 이듬해 봄까지로 제한했습니다. 이것도 맥주의 품질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정확한 기간은 성 미카엘 축일(9월 23일)부터 성 게오르크 축일(4월 23일)까지입니다. 양조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10월에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저장하고 있었던 재고 맥주를 빠르게 소비하고 새롭게 맥주를 생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옥토버페스트에는 재고 맥주를 소비합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옥토버페스트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이때가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훗날인 1810년의 가을입니다. 옥토버페스트는 바이에른 왕국(이 시절 바이에른은 공작령에서 왕국으로 전환하였습니다)의 왕이 될 왕세자 루드비히와 작센-힐드부르크의 공주 테레제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거행된 6일간의 축제였습니다. 일종의 결혼피로연인 셈이죠. 성대한 퍼레이드를 펼쳤고 역사속에 묻힌 경마 경기를 부활시켜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이와 함께 농업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농업 박람회에는 와인농장, 커피숍, 주류판매상, 제빵사, 요리사, 과일판매상 등이 참가하였는데 12개의 맥주 양조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맥주에 집중되면서 농업 박람회에서 맥주 축제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는 아우구스티너, 학커-쇼어, 호프브로이, 뢰벤브로이, 파울라너, 슈파텐의 6개 양조장만 참가할 수 있습니다. 10월에 하는 축제라 옥토버페스트라 하였지만, 독일이 통일된 이후부터 9월에 축제를 시작하여 10월 첫 번째 일요일까지 개최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겨울에 주로 맥주를 양조하고 여름에 맥주를 소비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맥주와 여름맥주가 생겨 났습니다. 겨울맥주(winterbier)는 탭맥주(Tapbier)라고도 하는데 겨울에 양조하여 그 해 겨울에 마시는 맥주를 말합니다. 보통 11월 초에 양조하여 12월에서 1월 사이에 마십니다. 여름맥주(sommerbier)는 저장맥주(Lagerbier)라고도 하며 겨울에 양조하여 세 달쯤 보관한 후 마시는 맥주로 보통 5월에서 10월 사이에 마십니다. 여름맥주는 겨울맥주에 비해 효모가 오랜 기간 활동하여 당을 더 분해하므로 알코올 도수가 높고 드라이한 특징을 가집니다. 맥주를 저장하기 위해서 10미터 이상의 땅을 파 지하 저장고를 만들고 8도씨 정도로 유지하였는데, 이 온도는 효모가 활동하기 좋고 박테리아가 활동하기에는 낮은 온도입니다. 낮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근처 호수에서 얼음을 캐 함께 보관하거나 땅 위에 밤나무를 심고 그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그늘에 맥주 정원이 생겼고 사람들이 찾아와 맥주를 마시는 공간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비어가르텐입니다. 이렇게 양조 시기를 지정한 법령은 1850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 5세는 1579년 뮌헨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빌헬름 5세가 계승하였습니다. 빌헬름 5세는 공국의 공식적인 양조장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호프브로이하우스입니다. 빌헬름 5세부터 대를 이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맥주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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