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통의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설립하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비어홀이 있다면? 500년 전통을 가지고 한 번에 3천 명 이상의 손님이 앉을 수 있는 호프브로이하우스(이하 호프브로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모차르트는 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o)에 영감을 준 것이 호프브로이를 방문했던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레닌, 존 F. 케네디,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수많은 정치인과 유명인이 찾을 만큼 유명한 비어홀이 호프브로이입니다. 호프브로이를 세운 인물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공작 빌헬름 5세입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이 그랬듯이 빌헬름 5세 또한 대단히 성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이 시기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무르익던 시기이긴 했지만, 빌헬름 5세는 더욱더 강력하게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레겐스부르크와 쾰른의 주교를 만들었고, 그의 영토에서 개신교 교도를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결국 그의 아들 대에 발생한 30년 전쟁으로 폭발하게 됩니다(30년 전쟁에 얽힌 맥주의 에피소드는 잠시 후 살펴보겠습니다). 정치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외골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궁정의 건물을 재건축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1589년에 설립한 바이에른 공국의 공식 양조장 호프브로이입니다.
빌헬름 5세 시기의 뮌헨의 맥주는 어땠을까요? 빌헬름 5세는 맥주순수령을 반포한 빌헬름 4세의 손자이며, 맥주 양조 시기를 법으로 지정한 알브레히트 5세의 아들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맥주 유산을 모두 물려받긴 했지만, 뮌헨의 맥주가 그리 신통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현지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즐기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귀족들은 그들이 마실 맥주를 대부분 수입해서 마셨다고 합니다. 당시의 공국에서 일하는 직원이 약 600명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에게 맥주를 공급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하급 직원들에게는 근처의 수도원에서 생산한 맥주를 공급해 주었고, 고위직 관리자들에게는 작센이나 아인베크같은 유명한 지역의 맥주를 수입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맥주를 수입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부담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양조장을 지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규모로 지을 생각을 했기 때문에 양조장을 짓는 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 양조장이 완공된 것은 1591년, 그해에 베네딕틴 수도원의 브루마스터를 데려와 당시의 전통대로 브라운 비어를 만들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605년 한 해 1,440hl 정도의 맥주가 양조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500ml 캔 30만 개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대부분은 공국의 직원들이 마셨고, 일부 남는 맥주는 공국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호프브로이는 과거 히틀러가 대중을 선동한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독일에서 비어할레라 부르는 비어홀은 바이에른 지방의 전통적인 맥줏집으로 단순히 맥주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비어홀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1920년 2월, 히틀러는 호프브로이에서 2천 명의 대중들에게 연설했고, 대중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때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고 전국의 비어홀을 순회하며 대중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했던 연설의 주제가 ‘우리는 왜 반유대주의자인가’라고하는데, 호프브로이의 씁쓸하고 어두운 과거입니다.
맥주순수령은 맥주에 물과 보리, 홉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법률입니다. 이러한 맥주수순령은 호브브로이가 생기면서 바이에른에 더욱 정착하게 됩니다. 독일 맥주에 품질과 일관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당시 양조업자는 이것을 법으로 여기기보다는 원칙과 명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빌헬름 5세의 아들로 바이에른의 공작이 된 막시밀리안 1세는 아니었나 봅니다. 법에서 허용하지 않은 재료인 밀로 맥주를 버젓이 양조했으니 말입니다. 맥주순수령에 따르면 밀맥주는 금지되어야 합니다. 밀은 맥주가 아니라 빵을 만들기 위해 독점적으로 비축해야 할 곡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은 남몰래 밀맥주를 양조하였고, 막시밀리안 1세는 이 밀맥주의 양조권을 독점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브라운 비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그보다 가벼운 화이트 비어(밀맥주)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맥주순수령에 의해 밀맥주의 제조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독일의 슈바르자흐 지역의 일부 귀족들은 밀맥주를 보란 듯이 양조하고 있었습니다. 맥주순수령을 반포한 빌헬름 4세마저 이 지역의 밀맥주 양조는 어찌하지 못했나 봅니다. 오히려 밀맥주를 무분별하게 양조하기보다는 어느 한 가문이 독점적으로 양조할 수 있도록 양조 전매권을 주었습니다. 그 가문의 이름을 딴 양조장이 바로 데겐베르크 양조장입니다. '세계 최초의 밀맥주 양조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602년 데겐베르크 가문은 후계자가 없이 대가 끊겨 버립니다. 이에 데겐베르크 가문은 밀맥주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막시밀리안 1세에게 양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막시밀리안 1세가 밀맥주의 양조 전매권을 얻었고, 막시밀리안 1세는 밀맥주의 전매권을 그의 공국 전체로 확대했습니다. 가문이 직접 밀맥주를 양조하기에 좋은 양조장이 있었으니 앞서 설립한 호프브로이입니다.
여기서 잠깐, 유럽에 막시밀리안이라는 이름의 유명인이 많아서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막시밀리안이고, 나중에 바이에른 공국에서 왕국이 되어 초대 왕이 된 인물도 막시밀리안이며, 멕시코의 황제로 있다가 총살당한 인물도 막시밀리안입니다. 모두 막시밀리안 1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막시밀리안 1세로 말할 것 같으면, 비텔스바흐 가문의 공작으로 독일의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연맹의 수장으로 가톨릭 수호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30년 전쟁은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종교를 떠나 경제와 정치적인 이합집산으로 변해 전 유럽을 초토화한 전쟁입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가문인 비텔스바흐는 당연히 가톨릭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막시밀리안은 기독교 연합을 대항해 가톨릭 연맹을 이끌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막후에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밀맥주를 팔아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이렇게 밀맥주를 판 돈으로 가톨릭 편에 군자금을 대었던 것입니다.
한편, 19세기 후반이 되면 밀맥주의 인기는 사그라듭니다. 필스너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텔스바흐는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밀맥주 양조권을 민간 양조장에 양도하는데, 그 양조장이 바로 현재 밀맥주로 가장 유명한 슈나이더입니다.
독일의 30년 전쟁은 처참했습니다. 30년 전쟁은 독일의 마을, 성당, 농장 등 거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제대로 남아 있는 맥주 양조장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맥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남았습니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이 있는 작센주에서는 30년 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631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기독교 연맹과 신성로마제국의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연맹 간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라고 부르는 이 전투에서 기독교 연맹을 이끈 구스타브 2세는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을의 한 농부가 다가와 이곳의 맥주를 구스타브 국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구스타브는 독일의 맥주를 마시고 갈증을 해소했고, 전쟁은 스웨덴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기독교가 처음으로 가톨릭에 대항해 승리한 것입니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은 기독교 군대가 승리한 이유가 구스타브가 이 마을의 맥주를 마시고 갈증을 달랜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주를 빚은 이 마을 우물의 이름은 ‘스웨덴 우물’이고, 라벨에 스웨덴 군복을 입은 구스타브가 있는 맥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 맥주가 있었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1632년 바이에른에도 스웨덴 군이 쳐들어와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보통 군대가 마을을 점령하면 식량을 약탈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스웨덴 군은 군기가 잡혀 있었고, 절대 약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고 돈을 지불하며 주민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 바이에른에는 일반 라거보다 더 강한 마이복이 있었습니다. 마이복은 귀족들이 수입해서 마시던 아인베크의 강한 맥주를 따라 호프브로이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 바이에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대신 보호금으로 맥주를 요구했습니다. 바이에른은 호프브로이의 마이복 334통을 스웨덴 군에 지불했고 도시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복잡한 결혼 동맹으로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는 개신교에서 뺏은 팔츠의 영지와 지위를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바이에른은 팔츠의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돌려주기는 했지만,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제후 지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고, 독일은 프랑스를 통일한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때 찢어져 있던 바이에른 공국을 하나로 합쳐 바이에른 왕국을 만들었으며 바이에른 왕국은 나폴레옹의 충실한 동맹이 되었습니다.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왕은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로, 그의 치세 때 거행된 왕세자의 결혼식 축하연이 옥토버페스트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그 왕세자는 막시밀리안이 죽은 뒤 바이에른 왕이 되었고,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는 호프브로이를 대중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이것은 독일 맥주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바로 맥주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곳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상식이 된 것입니다. 1852년이 되면 비텔스바흐 가문은 호프브로이의 소유권을 바이에른 주로 이전했고, 지금까지도 호프브로이는 바이에른주 정부가 소유한 양조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이에른 왕국은 50여 년쯤 이어지다가 프로이센과 함께 독일 연방으로 통일됩니다. 북독일에서 힘을 키운 프로이센은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지휘하에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싸워 이기면서 북독일 연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전쟁에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지만, 프로이센이 이기면서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이 중심이 된 독일 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에른이 새로 형성된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이에른은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연맹 편에서 싸웠을 정도로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개신교가 중심인 프로이센의 통치를 받는 것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바이에른도 오스트리아처럼 독립 국가로 남아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이때 바이에른은 독일 제국에 가입하는 대신 전 독일의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들 때 맥주순수령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제안했습니다. 북독일 지역의 양조장들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맥주순수령은 바이에른의 맥주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북독일의 맥주는 향신료와 과일 등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바이에른의 맥주순수령은 채택되었고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이 되었습니다. 비록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바이에른은 독자적인 군대와 외교권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프로이센은 5년 뒤인 1871년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마저 크게 이기며 통일된 독일 제국을 선포했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을 지지하며 독일 제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길어지고 여론은 악화되었으며, 바이에른을 다스린 비텔스바흐 가문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결국 비텔스바흐 가문의 왕 루드비히 3세가 퇴위하면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통치는 끝이 나게 됩니다.
1918년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통치는 끝났지만, 그 가문의 후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루드비히 3세가 죽은 뒤 그의 장남 루프레히트가 가문을 이어갑니다. 루프레히트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나치에 반대해 그의 가족이 큰 고초를 겪습니다. 한때 그의 부하였던 히틀러는 루프레히트를 이탈리아로 추방했고, 게슈타포는 그의 아내와 아들, 손자까지 체포하여 1945년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집단수용소에 감금했습니다.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은 루드비히 3세의 증손자이자 루프레히트의 손자인 프란츠가 잇고 있습니다. 한편, 비텔스바흐 가문은 1870년에 기존에 있던 양조장 시설을 개선해 ‘왕족의 맥주’라는 슬로건으로 가문 소유의 양조장을 새로 열었는데,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쾨니히 루드비히(König Ludwig) 양조장입니다. 이 양조장은 루드비히 3세의 셋째 아들에게 이어져, 현재는 루드비히 3세의 또 다른 증손자가 경영하고 있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했던 유럽의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지를 분할 상속하면서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고, 19세기에는 북독일에 강한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그 힘에 밀렸습니다. 800년간 이어져 온 가문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군주제가 해체되었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역사는 바이에른 더 나아가 독일의 역사와 동일시됩니다. 비록 비텔스바흐 가문이 자기 영지와 지위는 통일하지 못했지만, 맥주에서 만큼은 독일을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우리는 현재 독일 맥주의 순수함을 비텔스바흐 가문의 유산으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