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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Oct 19. 2023

논란 많은 일본 맥주 얼마나 알고 마시나요?




지난 기사 <외세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 맥주의 비긴즈>에서 한국 맥주는 외세의 침략으로 들어와, 한국 땅에 지은 일본 맥주 회사가 시작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도 일본 맥주는 여전히 인기가 많지만, 국제 정세가 불안하면 매번 논란이 많은 맥주로 둔갑하고, 가장 먼저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렇게 논란이 많은 맥주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마시고 있는 걸까요? 한국 맥주에 큰 영향을 준 일본의 맥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일본 대기업 맥주의 비긴즈는 어땠을까요? 즐겨 마시면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복잡한 감정이 들었던 일본 맥주, 그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요?


한국에서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맥주를 들고 있는 조선인 사진이 최초의 맥주 기록입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조선인이 실제 맥주를 마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도 맥주를 마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는 남아 있습니다. 일본에 외국 선박이 내항하기 시작한 에도시대 1613년, 나가사키에 입항한 영국 선박의 수하물 리스트에 맥주가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100여 년이 지나서 일본인이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일이 기록됩니다. 1724년, 당시 네덜란드 통역이었던 관리가 나가사키에 정박한 네덜란드인과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입니다. 19세기가 되면 일본인이 직접 양조를 해보기도 합니다. 에도막부 말기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고, 서양의 문물을 배우자는 난학이 확립되는데, 이 난학과 관련하여 저술된 책에 맥주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1853년, 카와모토 코우민(川本幸民,かわもと こうみん,1810~1871)이라는 일본인은 최초로 맥주를 양조해 봤다고 합니다. 그가 참고한 ‘화학신서’라는 책에는 상면 발효와 하면 발효에서 발효 온도나 투입 시간, 저장 기간 등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당시 확립되지 않았던 하면 발효 양조법도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한국은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맥주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흑선’이 내항하면서 큰 전환기를 맞습니다. 이듬해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는데, 에도막부가 개국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때 축하연에서 ‘흙빛을 띠고 거품이 많이 나는 술’을 일본에 헌상했다고 하는데, 맥주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한번 서양에 항을 내주기 시작하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과도 수호 조약이 잇따르고,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나가사키, 하코다테, 고베, 니가타 등 여러 항이 개항됩니다. 특히 요코하마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생기면서 그들을 위해 생필품과 식료품이 수입되기 시작하는데, 서양인이 일상적으로 마시던 맥주도 활발히 수입됩니다. 이렇게 맥주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참고로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수입 맥주는 빨간 삼각형 라벨을 가진 영국 배스 사의 페일 에일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최초의 상업 맥주 양조장, 스프링밸리 브루어리 (사진출처: 스프링밸리 브루어리 홈페이지)


하지만 수입된 맥주는 가격도 비싸고, 장기간의 운송으로 품질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코하마에 거류하고 있던 몇몇 외국인이 스스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일본 맥주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중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스프링밸리 브루어리입니다. 스프링밸리 브루어리에 앞서 1869년 독일 출신 양조자 비간트(Wiegand)가 요코하마에 세운 재팬 요코하마 브루어리도 있었습니다. 스프링밸리 브루어리는 1년 후인 1870년에 노르웨이 출신의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William Copeland)가 역시 요코하마에 세웁니다. 이 두 양조장은 같은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판매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양조장을 합병하기로 하고 각각의 이름을 따서 코플랜드 앤 비간토 상회를 만듭니다. 하지만 공동 경영의 문제로 이 체제는 오래 가지는 못하고 결국 스프링밸리 브루어리가 남은 지분을 모두 사들여 단독으로 남게 됩니다. 훗날 이 양조장의 자산을 이어받아 탄생한 것이 기린 맥주입니다.


삿포로 맥주


메이지 시기 일본은 빠르게 근대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유럽에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양의 제도와 문화를 서둘러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절단이 방문한 곳 중 하나에 영국 중부의 도시 버튼에 있는 올솝(Allshop) 브루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맥주 제조 과정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돌아와 사절단 보고서의 하나로 맥주 공장 견학기를 남깁니다. 메이지 정부는 관영의 맥주 양조장 설립에 착수해 1876년 홋카이도에 개척사 맥주 양주소를 설립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이 최초로 세운 맥주 양조장으로 훗날 민간인이 인수하여 삿포로 맥주(이하 삿포로)가 됩니다.


당시의 홋카이도는 개발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황무지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하고, 일본인을 강제로 혹은 자발적으로 이주시키며, 아이누 민족이 대대로 살던 땅을 빼앗았습니다. 홋카이도는 아이누 원주민이 부르던 이름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곳에 신사업 육성을 위해 30종 이상의 관영 공장을 설치하는데 그중 하나가 맥주 양조장입니다. 홋카이도는 맥주를 만들기에 유리한 조건이 많았습니다. 맥아 보리를 자생적으로 재배하여 맥주 재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맥주를 저온에서 발효시키기 위한 얼음이 풍부했으며, 전체적인 기후와 풍토가 유럽의 맥주 벨트(아일랜드, 영국, 독일, 벨기에 등 유럽의 맥주 생산 국가가 위치한 지역)와 비슷했습니다.

1877년 발매된 삿포로 라거의 라벨 (사진출처: 삿포로 맥주 홈페이지)


1877년 삿포로는 독일식 맥주를 생산하여 이름을 ‘삿포로 라거’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인이 만든 최초의 맥주입니다. 이 맥주의 라벨에 홋카이도의 북진 깃발에 있는 붉은 별을 넣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맥주를 가르켜 ‘아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삿포로 맥주에는 여전히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삿포로의 별은 일본인에게 불모지 홋카이도를 개척한 당당한 역사의 상징일지 모르겠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누의 토지를 약탈하고 그들의 전통을 금지하는 등 민족 말살을 위해 동화 정책을 펼쳤던 핍박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 강점의 역사와도 닮았습니다.


기린 맥주


홋카이도에 첫 상업 양조장이 생긴 이후 일본 본토에는 두 개의 대기업 맥주회사가 생겨납니다. 아사히 맥주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관서 지방의 맥주회사로 생겨났다면, 기린 맥주는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방의 맥주회사로 생겨납니다.


기린 맥주를 만든 사람은 미쓰비시 기업의 2대 총수 이와사키입니다. 이와사키는 미쓰비시의 자본력을 가지고 스프링밸리 브루어리를 인수하여 기린 맥주의 전신인 재팬 브루어리를 설립합니다. 재팬 브루어리는 스프링밸리 브루어리의 대부분의 직원을 인수하고, 기존의 양조 설비를 매각한 후 독일의 최신 설비를 도입합니다. 그런 후에 탄생한 맥주가 1888년에 발매된 기린 맥주입니다. 재팬 브루어리는 메이지 상점과 총판 계약을 맺고 기린 맥주를 개당 18전에 판매합니다. 기린 맥주는 미쓰비시의 자본력을 등에 업고 전국구 맥주로 빠르게 발돋움하여 전후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가 됩니다. 이 타이틀은 훗날 아사히 맥주가 가져갑니다. 1907년에 미쓰비시 기업과 메이지 상점의 공동 출자로 완전한 일본 국적의 새로운 회사 기린 맥주(이하 기린)로 재탄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린은 재팬 브루어리에서 조직과 사업을 그대로 인수하였습니다. 참고로 기린이 한국에 진출하여 설립한 맥주회사가 OB맥주의 전신인 쇼와기린맥주(소화기린맥주)입니다.

1962년 기린 맥주 포스터 (사진출처: 기린 맥주 홈페이지)



그런데, 기린 맥주의 기린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이 기린은 동물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기린이 아닙니다. 용의 얼굴과 사슴의 뿔, 말의 몸을 가진 동양의 상상의 동물입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어머니가 기린 꿈을 꾸셨다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주몽이 기린을 타고 승천했다고도 합니다. 기린 맥주라는 이름은 미쓰비시 경영자의 제안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에도 막부 후기에 일본에서 활약한 미쓰비시의 고문 변호사인 토마스가 친구인 사카모토 료마(일본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인물로 메이시 유신을 이끈 사무라이이자 철학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료마는 우리말로 용마(龍馬)인데 용의 머리와 말의 몸을 가진 기린과 서로 통한다고 하네요.


기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미쓰비시라는 기업입니다. 미쓰비시는 전쟁 범죄에 적극 가담한 전범 기업 중 하나입니다. 전범 기업은 전쟁 당시 적극적으로 무기를 개발하고 식민지의 국민을 강제 징용하는 등의 행위로 막대한 부를 쌓은 기업을 말합니다. 이 중 미쓰비시는 리더급에 해당합니다. 미쓰비시는 전쟁 중 전투기나 배, 탱크 등 국가가 필요한 전쟁 물자를 만들면서 크게 성장해 왔는데 지금도 자위대용 무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미쓰비시가 조선인을 강제 동원한 장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군함도입니다. 당시 행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오래되고 지리멸렬한 싸움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 시대 강제 징용에 관해 배상하라’는 판결로 막을 내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지 몰랐습니다. 미쓰비시는 아직도 책임 있는 행동을 거부하고 있고, 한국은 제삼자 변제 방안을 내놓았네요.


아사히 맥주


서일본에서도 맥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1889년 오사카에 관서 지방의 대표 맥주로 오사카 맥주(이하 오사카)가 설립됩니다. 오사카는 1892년 아사히 맥주를 발매하여 큰 인기를 얻습니다. 지금도 아사히 맥주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입니다. 하지만 80년대 초반 아사히 맥주는 일본에서 점유율이 10%도 안 되어 산토리에 매각당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는 맥주입니다.


1906년 일본의 맥주 산업계에서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사카와 에비스, 삿포로를 합병하여 하나의 큰 맥주 회사를 만든 사건입니다. 합병된 회사는 이름도 대일본맥주로, 합병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 맥주의 왕’이라 불리는 마코시 쿄헤이이라는 인물입니다. 쿄헤이는 이벤트와 광고 및 입소문에 의한 홍보 등 프로모션을 포함한 판매 전략의 귀재라 불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쿄헤이는 일본 내각에 ‘국내의 과다 경쟁을 배제하고, 수출을 촉진하며, 자본의 집중을 도모하기 위해 합병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해 이를 끌어냈습니다. 세 개의 회사를 합쳐서 점유율 70% 정도로 만들고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독과점 형태를 이어갔습니다. 참고로 대일본맥주가 한국에 진출하여 설립한 맥주 회사가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조선맥주입니다.

1949년 설립된 아사히 브루어리 (사진출처: 아사히 맥주 홈페이지)


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은 전쟁 물자와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맥주 원료의 수입마저 힘들어집니다. 이때부터는 맥주 브랜드의 사용도 폐지하고 그저 ‘맥주’라는 하나의 브랜드만을 사용했습니다. 아사히 맥주 브랜드도 이때 중단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독과점 방지법에 의해 대일본맥주는 해체되어 (세 개가 아닌) 두 개의 회사로 분리됩니다. 삿포로와 에비스는 여전히 합쳐진 상태로 동일본을 대표하는 삿포로가 되었고, 오사카는 아사히가 되어서 서일본을 대표하게 됩니다. 분할된 시점에서 맥주 시장의 점유율은 삿포로가 39%, 아사히가 36%, 기린이 25%였습니다.


일본에서 맥주는 한동안 기린, 아사히, 삿포로 3강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 세 개의 맥주회사는 공교롭게도 1953년에 거의 동일한 점유율 33%를 차지합니다. 같은 점유율에서 시작한 이때부터가 진정한 경쟁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린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60% 이상의 고공 행진을 이어가다가 아사히가 ‘아사히 슈퍼 드라이’를 발매한 이후 2000년대에는 줄곧 1위 자리를 아사히에 내어 줍니다. 아사히는 한때 삿포로에 추월당하고 맥주 신생기업인 산토리에도 뒤처질 위기에 처했으나 1987년에 발매한 아사히 슈퍼 드라이의 히트로 현재 근소하게 기린을 앞서고 있습니다. 삿포로는 서서히 점유율이 감소하다가 이제는 산토리에 따라잡혔습니다.

아사히의 대표 맥주 아사히 수퍼 드라이 맥주 광고 (사진출처: 아사히 맥주 홈페이지)


그런데, 50여 년간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아사히가 기린을 제치고 업계 1위가 된 이야기는 한번 곱씹어 볼 만합니다. 아사히는 5~60년대 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식당이나 레스토랑 등의 업소용 맥주가 주류였습니다. 하지만 60년대 가정용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맥주는 더 이상 업소에서 마시는 고급 음료가 아니라 집에서도 마실 수 있는 대중적인 음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사히는 여전히 업소용 시장에서 선두 기업 기린과의 경쟁에만 몰두했습니다. 아사히는 이미 맥주 제조 기술에서는 경쟁자를 앞서고 있었습니다. 독일식 맥주 공법, 옥외 발효 저주 탱크, 알루미늄 캔, 미니 통 맥주 등은 모두 아사히에서 먼저 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히는 기술자 중심의 제조 부분을 중시했지만, 관리, 영업 조직을 소홀히 했습니다. 아사히는 점점 몰락의 페달을 밟아 가고 있었고 사내에는 패배주의와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를 바꾸기 위한 노력은 외부 컨설팅과 자체 진단, 그리고 새로 취임한 하구치 사장의 리더십과 소비자 연구였습니다. 후지사와 마야코가 지은 ‘사장님, 아무도 우리 제품을 받아주지 않습니다’라는 책에 이 비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사히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모든 맥주 맛)을 버리기로 하고, 오로지 고객의 목소리만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 두 차례의 미각 선호도 조사를 해보니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일본의 대다수 맥주 애호가가 풍미가 강하고 쌉쌀한 맛의 맥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릴 수 있는 ‘가라구찌(からくち, 辛口)’가 있는 맛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라구찌란 원래 음식에서 매운맛을 뜻하는 단어지만, 술에서는 드라이하고 단맛이 적은 맛을 말합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맥주가 밍밍하기는 하나 음식과 잘 어울리는 아사히 슈퍼 드라이입니다. 이 맥주는 한때 폐사 위기까지 갔던 회사를 살렸고, 아사히는 이 맥주 덕분에 일본 시장에서 정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쟁사 회사들이 발포주를 생산하며 맥주로는 부족한 매출을 충당하고 있을 때도, 아사히는 ‘아사히는 드라이 맥주만으로 승부합니다. 발포주는 발매하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발포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편, 아사히는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성향의 기업입니다. 아사히가 극우 기업으로 활동했던 사건 중 하나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칭다오 맥주를 차지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합니다. 칭다오를 두고는 독일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공방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칭다오는 일본군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칭다오 맥주는 아사히의 전신에 해당하는 대일본맥주에 매각됩니다. 이 소유권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국민당 정부의 감독을 받은 중국의 것이 되었다가, 1949년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정부의 국유 기업이 됩니다. 2009년 사정이 나아진 아사히는 AB InBev가 가지고 있던 칭다오 맥주의 지분 19.9%를 사들이고, 2017년 이를 다시 매각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깁니다.


산토리 맥주


산토리 맥주(이하 산토리)는 원래 1899년에 설립된 위스키 생산업체 산토리가 모기업입니다. ‘신지로 토리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산토리는 1963년에 맥주 산업에 진출하여 산토리 맥주를 발매합니다. 사실 산토리가 맥주 산업에 진출한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1928년에 이미 가나가와 현에 있는 일본과 영국의 합작 회사 캐스케이드를 인수해 ‘신 캐스케이드‘라는 맥주를 생산한 적이 있습니다. 저가 경쟁을 펼쳤지만 기존 대기업 맥주회사의 압박과 견제로 맥주 사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가 1934년입니다. 하지만 산토리는 맥주의 꿈을 접지 않았습니다. 절치부심하여 열처리하지 않고 효모를 제거한 생맥주를 발매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아사히의 열처리를 하지 않고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와 생맥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1963년 준공 당시의 산토리 맥주 공장 (사진출처: 산토리 맥주 홈페이지)


산토리는 아사히와 기린이 드라이 맥주 전쟁으로 한창일 때 맥아 100%의 맥주를 주력으로 삼습니다. 2003년에 발매한 ‘더 프리미엄 몰츠’는 1980년에 발매한 ‘몰츠’를 업그레이드한 맥주입니다. 이것은 크게 히트했고 현재 산토리의 시그니쳐 맥주가 되었습니다. 산토리는 1994년에 ‘HOP’S 生’이라는 발포주를 만들어 일본 내에서 발포주 시장을 재점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산토리는 아무래도 맥주 후발 주자이다 보니 혁신적인 제품과 다른 맥주와의 차별화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토리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점유율이 꾸준히 올라 2000년대 후반부터는 삿포로를 제치고 일본 내 점유율 3위에 오르게 됩니다.

일본의 4대 맥주의 역사를 살펴보니, 하나는 남의 땅을 뺏은 역사, 하나는 전범 기업의 역사, 하나는 극우 기업의 역사가 보입니다. 물론 문화와 예술은 정치 및 역사와는 서로 다른 것이며, 맥주와 같은 식문화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기업이 있는 한 일본 맥주에 대한 논란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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